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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훈 시인 /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7.

이승훈 시인 /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1

 

  비가 와서 엉터리 시 한 줄 쓰오. 비가 와서 비가 와서 쓰는 시 나 대신 저 비가 쓰면 좋지. 그러나 비는 시 쓸 줄 모른다고 대신 쓰라고 유리창에 이마 대고 말하네. 돼지 저금통에 동전 넣어도 계속 비는 오고 저금통은 차지 않고 다시 동전 넣고 또 넣고 그래도 비가 온다. 고기반찬 달라고 비가 오네.

 

  2

 

  “선생님은 신부십니까?” 어느 날 택시 기사가 물으면 “네. 신부 맞아요.” 대답하고, “선생님은 스님이십니까?” 어느 날 택시 기사가 물으면 “네. 스님 맞아요.” 대답한다. 이젠 신부든 스님이든 부르는 대로 모두 나다. “저기 영안실 앞에서 세워 주세요.”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앞에서 택시를 내린다. 5층 뇌신경과 복도 7번 진료실 앞에서 기다릴 때 간호원이 나와 “이승훈 님!” 부른다.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번 째입니다.” 내가 네 번째다. 신부든 스님이든 네 번째든 모두 같다.

 

  3

 

  식탁에 앉아 양파 먹을 때 번개가 친다. 입에 물고 있던 양파가 바닥에 떨어진다. 양파가 바닥에 누워 쳐다본다. 양파가 아니라 무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오 세상에! 무 먹을 때 번개가 치다니! 이젠 무같은 건 먹지 말아야 겠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2월호 발표

 

 


 

이승훈 시인

1942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사물A』,『환상의 다리』, 『당신의 초상』, 『사물들』,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 『밝은 방』, 『나는 사랑한다』 등이 있음. 시론집으로 『시론』, 『비대상』, 『이상시 연구』, 『시작법』, 『모더니즘 시론』,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한국현대시 새롭게 읽기』, 『해체 시론』, 『한국현대시의 이해』등과 산문집 『너의 행복한 얼굴 위에』, 『너라는 신비』, 『모든 섬은 따뜻하다』, 『당신도 15분 유명하다』 등과 편저로는 『문학상징사전』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한국시협상 수상.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