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 시인 / 달팽이 학습일지
월요일 나는 앞얼굴과 뒷얼굴이 다른 껍질이 부서진 달팽이, 내 주인은 아픈 나를 ‘옐로우 트리’라고 불러요 그녀와 나는 자웅동체, 한 몸이예요 나처럼 그녀도 우렁이 껍질같은, 곱사등을 형벌처럼 짊어지고 살지요. 작고 왜소한, 달팽이 껍질 같은 그녀 나는 광렌즈 끼고, 매일 그녀를 은밀하게 관찰합니다. -한번 뒤집어지면 말라죽어버리는, 그녀도 나처럼 똑바로 누울 수가 없어요.
화요일 그녀는 매일 달팽이를 관찰합니다 달팽이 똥을 이쑤시개로 뒤적이며 근심스레 살핍니다 -녹색, 빨강색, 노란색 나도 그녀 몸을 관찰합니다 그녀 정수리, 미간, 목울대 그녀가 나를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나는 그녀를 애처롭게 쳐다봅니다. 그녀가 오늘 밥을 얼마나 조금 먹었는지 내 더듬이는 그녀에게 예민합니다.
수요일 달팽이는 어둡고 조용하며 따뜻한 곳을 좋아해요 좁고 아늑한 그녀 방이 좋습니다 그녀는 오늘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싱싱한 상추, 당근, 바나나를 먹여주고 싶어요 속을 말갛게 헹궈주고 싶어요
목요일 새벽이슬은 허기져요 삭제된 그녀의 뇌도 허기져요 신경섬유의 다발성 병변(neurofibrillary tangle)과 초로성 반점(neuritic plaque) -옐로우 트리, 그녀에게 Dr. 알츠하이머씨가 왕진을 왔냐고요?
금요일 기억장애로 햇빛을 폭식하는, 그녀 하루 동안 달팽이가 몇 cm 기어갔는지 집착하는, 그녀 솔론드 박사에게 내일은 편지를 부쳐야겠어요 그녀의 알츠하이머 10번 염색체, 11번 염색체에 이상이 생겼는지?
토요일 20121213 암호처럼 비종일비 주룩주룩비 주룩 그녀가 연애를 하냐고요? 14살, 소녀의 꿈을 임신중절 수술한, 친 오빠 곁가지 건넌 뒤, 말을 놓아버린 그녀 그녀 속잎이 아파요 오, 나는 그녀와 짝짓기를 할 수 없어요
일요일 그녀 베개 밑에 구겨진, 옐로우 트리 잠든 그녀 손가락에 더듬이가 닿았습니다
달팽이, 뿔에 붙은 꽃불,
웹진 『시인광장』 2013년 1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정현 시인 / 묘비명 선언 (0) | 2020.08.28 |
|---|---|
| 강재남 시인 / 아무렇지 않게 오렌지 (0) | 2020.08.28 |
| 김영식 시인 / 처서 (0) | 2020.08.28 |
| 이현호 시인 / 벤치 (0) | 2020.08.28 |
| 이성임 시인 / 그늘을 경작하다 (0) | 2020.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