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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시인 / 묘비명 선언
나는 좀도둑이다 평생 나는 내 시간을 훔치느라 인생을 탕진했다 이제 나는 검버섯 그런데도 나는 햇살이 좋다가도 싫다가도 좋다 나쁘다 한다 간혹 나는 태양이 산산조각 나길 바란다 하염없이 나는 무수한 베란다를 하나 가지고 있고 오늘은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따분하고 따사로운 빛의 환란에 팔 벌린다
새벽마다 나는 내가 문득 정신병자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은 아니다 종종 그렇다 기껏 나는 망각의 형상인 것이다 어제 나는 대리석 아래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시궁쥐 한 마리를 보았다 미망인(未亡人)은 길고 납작한 도구를 사용했고 단 한 번 쓰곤 버렸다
그래도 첫 페이진 읽었다 태초에 어쩌고저쩌고 매일 아침 나는 간단한 삶이 평온하다 선언한다 하지만 나는 여태 누군가의 하룰 간단히 마주한 적 없고 당장에라도 산송장들의 거대한 그림자에 짓눌리면 한낮에도 악몽이다
나는 영혼으로 태어났고 환영처럼 버려진다 나는 거리의 쓰레기들 이를테면 미치광이 거지와 부랑자와 창녀와 아무렇지도 않게 놀아나는 어릿광대 같은 세상의 모든 정부와 입 맞추고 싶지만 역시 말뿐이다
지금 나는 번개처럼 번뜩이며 움푹 팬 살갗으로 생명을 감각한다 단지 길게 쌓아올려진 이 위인의 대단한 인생은 조금 지루하다 하지만 무거운 잿더미 너머 파수꾼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뭉게구름은 한 번도 지루하지 않고 자세히 보면 창백하고 한동안은 길고 긴 비명처럼 풀려나는 그것이 나는 망자의 영원한 안식을 자유롭게 농락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섬뜩하게 혹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악읜 없다 단지 벽에서 흘러내릴 모래알갱이들의 질감 같은 손길이 필요할 뿐 그러나 나는 한겨울 끝자락엔 먹장구름의 내장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싶어진다
보드랍게 포효하는 호랑이 뭉개진 혓바닥을 자유롭게 날름대는 뱀 텅 빈 예감으로도 붉게 튀어 오르는 해골 그리고 활짝 핀 국화 한 송이¹속에 숨어 자꾸만 날 옭아매는 검은 는개의 공포 나는 최초의 열사병이다
나는 최후의 몽유병이다 세상과 나는 황량한 열대우림 속에 병원처럼 갇혀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모의(謀議)하는 것이다
나는 혓바닥처럼 흘러 다닌다 쏘다닌다 그러다 나는 어느 공기 속에서 반쯤 잘린 내 폐허의 집에 경악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나절 액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닌 유령 같은 물질의 망령에 질질 끌려다닌다
나는 푸르스름하게 살아있고 누구도 상처투성인 내 얼굴을 모른다 관심조차 없다 여전히 나는 좀도둑, 누군가의 삶을 간단히 훔쳐대는 맛을 알아버렸는데 다행히 미망인은 내가 무엇을 훔치든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경멸하고 가끔 나에게 분노마저 쏟는다
나는 피식 웃다가 운다 어쩌면 나는 구덩이 같은 감옥만을 열렬히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19XX년 작고 썩은 내 나는 시궁창의 뿌리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태어나자마자 육체를 버렸고 그것이 지금껏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거라 믿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요즘 흑백처럼 죽어가는 연습에 몰두한다 내가 너무 자유로운 척하는 것 같아 역겹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한 거짓말쟁이고 나는 혹독한 협잡꾼이고 나는 열렬한 사기꾼이다 순간순간 나는 실패와 변명을 줄기차게 뱉어내려 무섭게 작정한다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전염병이고 하루라도 잘난 척하지 않으면 기어이 열병을 앓는 병자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정신병자고 끝없이 정신병자고 그냥 정신병자로 단단히 늙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끝끝내 그런 나를 버리진 못한다
¹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에서 가져와 변주 이용했습니다
계간 『시산맥』 2019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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