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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재남 시인 / 아무렇지 않게 오렌지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8.

강재남 시인 / 아무렇지 않게 오렌지

 

 

하루를 얼른 써버려야겠다 마음이 말랑해지고 있으므로,

 

여름이 흔들린다

최대한 비극적이게 운명적이게

 

여름을 맞는다 바람이 자란다 공간이 기울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잘 가요 오렌지

 

시간이 멈춘다 공간이 깨진다 그늘진 노랑이 노랑에 갇힌다 그늘의 촉수는 그늘을 흡수하고 노랑이 숨을 트는 동안

 

나비가 날고 꽃잎이 떨어진다

오렌지는 침묵이면서 노래, 오래된 졸음, 바람을 옮기는 나비,

 

나비는 다른 세상에서 자유롭다

당신은 자유롭게 이별을 하고 봉인된 여름을 자른다

 

시들어가는 꽃이 걸어온다

꽃의 전생을 다른 계절에게 보내기로 한다

 

기억을 잃은 오렌지가 팽팽하다

내 전생이 꼬인 걸 비로소 알겠다

 

잘 가요 오렌지

 

어제는 오렌지나무 아래를 지나는 당신이 있었고 오늘은 노래를 부르는 당신이 있고 어제는 노래를 배우지 못한 당신이 있었고

 

당신은 낙관적인 이야기를 비관적이게, 당신을 버린 유쾌한 서블라임으로,

 

공간이 공간을 쏟아낸다

 

나와 다른 공간에서 나와 같은 오늘에 살게 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잃어버린 색을 당기니 불안정한 오렌지가 끌려온다

무른 마음이 여름을 점령한다

 

계간『시인시대』 2020년 봄호 발표

 

 


 

강재남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1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서정시학, 2017)가 있음. 2017년 한국문화예술유망작가창작지원금 수혜. 2017년 제6회 한국동서문학작품상 수상. 통영청소년문학아카데미주임강사. 강재남의포엠산책 연재(경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