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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옥 시인 / 비의 노래 외 1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31.

이길옥 시인 / 비의 노래

 

 

한밤

천길 깊이에서

낚싯대를 들고

비의 대열에 끼어 노래를 낚고 있다.

 

낚시에 걸린 노래 속에

봄의 속살이 묻어나고

 

또한

노래 속에는

생명이 끄나풀이

오금을 못 쓰는 유희를 낳고 있다.

 

유희에 취해 기쁨을 씹는 아량으로

나뭇가지 끝

무녀의 풀어헤친 옷소매마저 걸린다.

 

우두둑

땅을 밟고 일어서는 빗줄기

쥐었다 펴보면

잔잔히 흐르는 노래

내 혈관 어느 계곡에서 자맥질한다.

 

한밤

 

칠흑에서도 번득이는 낚시에 걸린

비의 악보에는

유년에 잃었던 내 이야기가 살아난다.

 

 


 

 

이길옥 시인 / 빈병

 

 

누가

양심을 버리고 갔다.

 

등산로

바위틈에 끼어있는

병 하나

 

내용물을 내준 뒤

거꾸로 처박혀

버리고 간 양심을 담고

오랫동안 방치된 채

오들오들 떨며 파랗게 질려 있다.

 

숱하게 받은 눈총으로

등 돌린 관심으로

병은

온몸에 병이 들어 있다.

새파랗게 병들어 있다.

 

 


 

 

이길옥 시인 / 빛

 

 

성질 한번 괴팍하다.

 

결코 꺾을 수 없는 곧은 성품으로

축축하게 젖은 빨래나

질척거리는 논길에 들어

물기를 내쫓는다거나

 

창호지 뚫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방구석 어둠을 몰아내는

고약한 심술로 칼을 휘두르는 놈이다.

 

장마철

눅눅한 습기로 짜증이 범벅된 공기를

꼬실꼬실하게 말려주어

말쑥한 차림으로 상큼하게 외출하게 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도

성질은 고약한 놈이다.

 

여름 한낮 노동판을 휘젓고 다니면서

헉헉거리는 일손을 쥐어짜

굵은 땀방울을 끌어내고도

서슴없이 달라붙어 사고 치는 놈이다.

 

 


 

 

이길옥 시인 / 빛나게 하는 것

 

 

1.

 

닦으면 빛날 줄 알았는데

문지르면 반짝일 줄 알았는데

샛강 모래 둔덕에 묻혀있던

곱상한 돌 하난 주워와

닦고 문지르며 알았다.

빛은

닳아야 난다는 것을

 

2.

 

많이 배우면 훌륭한 줄 알았는데

높은 자리에 앉으면 유명한 줄 알았는데

학벌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자리 높은 사람을 대하고 알았다.

빛나는 것이

엉큼한 굴뚝 속 숯검정이거 닳았다는 걸

 

3.

 

할아버지 몸에 밴 완숙의 빛은

오랜 세월의 수세미로 씻고 문질러 닳아진

인품의 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길옥 시인 / 사는 일

 

 

질기다 하고

모질다 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승과 저승이 갈라지데요.

아주 금방.

찰나이데요.

 

팍팍하다 하고

고추처럼 맵다 하는데

순식간에

번쩍

짧은 빛 내림 속에서도

꿈이 둥지를 틀데요.

 

저승까지 갈 것 없이

발길 돌려

꿈의 둥지에 잠깐 쉬며

환한 등 하나 밝혀두면

꿈이 익을까요?

 

구겨진 삶이 주름을 펴고

주름의 사이에 기생하던

모질고 팍팍한 세월의 찌꺼기

둘러맨 악취

모두 빨고 나면

좀 개운해질까요?

사는 일이.

 

 


 

 

이길옥 시인 / 사대(四代)

 

 

할아버지께서는

오래 두고 쓸 것은

짚으로 묶어 눈에 띄는 곳에 걸어두셨고

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싶으면

쌈지에 넣은 뒤 주둥이 단단히 묶어

소중하게 품에 넣고 사셨다.

 

아버지께서는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선반에 올려두고

필요할 때 내려 쓰셨다.

돈 몇 푼 챙겨 넣은 지갑은

왼쪽 안주머니 심장 가까이에 넣고

단추를 잠근 뒤 쉽게 꺼내시는 법이 없으셨다.

지갑에서도 심장 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내다 버린다.

필요할 때 다시 사다 쓴다.

지밥엔 돈 대신 카드 몇 장이 들어 있다.

카드의 위력이 대단하다.

잘 쓰면 보검이지만 못 쓰면 목이 잘린다.

 

자식 놈들은

아예 완제품만 쓴다.

고쳐 쓰는 법이 없다.

새것이 좋단다.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한다.

 

변하는 세상이 좋기는 좋다.

 

 


 

 

이길옥 시인 / 사랑 그 안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로 도장 찍으며

절대로,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던

찰떡같은 맹세를 들춰봤다.

 

더러는 하나가 되어

면도날로도 비집을 틈이 없는데

더러는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틈을 두고

위기의 급물살에 휩쓸려

단정의 강폭을 넓히고 있었다.

 

사랑이 방전된

텅 빈 가슴에 들어찬 냉기로

오들오들 떨거나

 

사랑이 익어 터져 넘치는 온기로

노골노골하게 데워지거나

 

사랑의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그 안에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사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길옥 시인 / 사랑의 크기

 

 

티격태격

부딪쳐 소리 날 때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한 이불 속에서도 등 돌려

눈치 볼 때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 사랑이

아파 누워있을 때

손톱만큼 보이더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그가 저승행 이삿짐에 실릴 때

그때

크게 너무 크게

나를 덮쳐왔습니다.

 

 


 

 

이길옥 시인 / 사랑할 때

 

 

가슴에 넘치는 황홀감이

몸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닌다.

 

무중력으로

둥 떠서

햇살 바늘에 콕콕 찔리는

쾌감에 감전되어

몸을 비튼다.

 

神도

미처 느끼지 못한 흥분

 

모두

求하고

전부 얻어

금방 터질 것 같은 조마조마한 떨림

 

꿈이 아니길

살 꼬집어보는 짜릿함

 

그 무엇도 필요 없다.

더 바랄 게 없다.

 

 


 

 

이길옥 시인 / 사실을 견디는 법

 

 

머리카락이 검은색을 버리면서부터

시어머니의 꼬장꼬장한 성정에서 자라던 가시가

더 날카롭게 끝을 세워 세를 넓힌다.

 

좀체 수그러들 줄 모르는 망령이 도지고

탱탱하게 부푼 오기가 부아를 끓이면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과 초조함

불안감이 안절부절못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걸리면

체면에 똥물 뒤집어쓰기 딱 알맞은 착각인데

기를 꺾지 않은 것은 노망기 발동이거나

자식을 배경한 배짱의 몸부림인데

 

성미 괴팍한 며느리라도 들였더라면

밥상에서 밀려나 찬밥으로도 감지덕지

울컥 눈물 쏟아 감사해도 문밖 신세임이 뻔한데

 

아직

공자님 말씀이 삼강오륜 낡은 책장에 남아 색이 빠진 채

눈치 앞세워

두 손 싹싹 빌며 무릎 꿇고 애걸하는 데에 마음이 약해져

감정 끌고 가 눈 한 번 찔끔 감아주고

노인네 성정에 뛰어들어 남은 삶의 끈을 풀고

나의 내일을 들여다본다.

 

죽어주는 게 맘 편하여

공자님께 문안드린다.

 

 


 

 

이길옥 시인 / 사투리

 

 

우리끼리 잘 통하는 말

그래서 스스럼없이 쓰는 말

시도 때도 없이 끼워 넣고 써야 감칠맛 나는 말

사전에 없는 말

 

우리 동네에 흔한 말

아무도 꼬투리 잡지 않는 말

양념처럼 넣어야 제 맛을 내는 말

 

반가운 이웃이나

오랜 벗을 만났을 때 툭 튀어나오는 말

느티나무 그늘에 멍석 깔고 둘러앉아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넘치는

막걸리에 섞어 마시는 말

 

오래 묵은 된장 맛이 홀딱 반한 말

 

기뻐 미치겠을 때

화가 독이 올라 물불에도 겁 안 날 때

사심 없이 꺼내 쓰는 말

 

쓰지 않으면 혀에 가시 돋는 말

툭 터놓고 쏟아내야 가슴 후련해지는 말

사전에 없어서 사투리라 하는

흙냄새 쇠똥냄새 사람냄새 범벅된 말

 

죽을 때까지 쓰다 갈 말

 

 


 

 

이길옥 시인 / 색안경을 쓰는 때

 

 

바로 보기가 부끄럽거나

마주 대하는 게 떳떳하지 못한

그래서 늘 고개가 무거운 자의 눈에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핏기 잃을 때

 

부담스런 관계 사이에 끼어

마음 졸이며 안절부절못하는 속내가

표정 관리가 서툴러 진땀을 뺄 때

 

긴장할수록 굳어지는 얼굴 근육이

서서히 일그러질 때

 

이럴 때

필요한 게 색안경이다.

 

당당하지 못함을 숨기고 감출 때

맞서서 대적할 능력이 부족할 때

부끄러움이 홍수 나 자존심이 뭉개질 때

 

그럴 때

필요한 게 색안경이다.

 

폼 잡고 뽐내며

멋과 풍류라 깝죽거릴 때

필요한 게 아니다.

 

 


 

 

이길옥 시인 / 섞인다는 것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린다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가장 가까이서 부딪히며

몸 달아오르는 것이다.

살 맞대고 같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부둥켜안고 심장 뛰는 소리에

풍덩 빠지는 것이다.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벽을 뚫고 스며드는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담을 넘어 눈독 들이는

용기가 있어야 가망이 있다.

마음을 녹여 저어주어야 이루어진다.

 

구멍을 뚫고 새들어야 한다.

발을 들여놓고 오기라도 부려야 한다.

무턱대고 끼어들어 버무려져야 한다.

 

섞인다는 것

내가 죽어주는 것이다.

 

 


 

 

이길옥 시인 / 세월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병색 짙은 노인이 앉은 의자가

껍질뿐인 노인의 무게에도 힘겨워하고 있다.

의자도 노인만큼 수명의 끝이 가까운가 보다.

부름켜 층층의 틈에 벤 고난의 세월이 자릴 비운 사이

각질도 힘을 잃고

두껍게 입었던 페인트를 벗고 있다.

볼품사납게 상처만 딱지로 붙어 있는 의자가

노인의 가래 끓는 소리에 놀라 삐걱거린다.

모진 세월을 살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젊음과 함께 빠져나가고 남은

몇 가닥의 탈색된 흰 머리카락이

노인의 이마에 흘러내려

깊게 패인 주름에 끼어든다.

골 깊은 주름의 이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고달픈 삶의 흔적이 머리카락을 힘겹게 잡고

지난날의 누더기를 벗겨보지만

어디에도 노인이 만들었던 기쁨이 없다.

이미 구겨진 자존심이 실밥 터진 옷섶에 말려

미안한 이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음을

흘깃흘깃 쏘아대는 행인의 눈총으로 읽고

노인은 변명을 까칠까칠 메마른 혓바닥에 묻고 있다.

하루를 의자의 신음 소리와 놀던 노인이

후들거리는 무릎을 지팡이의 힘을 빌려 세우자

우두둑 관절의 몸서리

낡은 의자가 허리의 통증으로 들썩인다.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누더기의 땟국이 번지듯 어둠이 내리고

노인은 어기적어기적 기다림이 끝난 어둠의 터널로

서서히 빨려들고 있다.

 

 


 

 

이길옥 시인 / 세한의 뼈

 

 

먹물이 붓의 털을 건든다.

킥킥킥

털들이 일제히 발작을 일으킨다.

 

시커먼 발작의 잔해들

화선지 촘촘한 몸피를 파고든다.

 

푹 찍고

확 그은 자국에 선명한 뼈

날카로운 끝이

겨울 한파의 심장을 찌른다.

 

으스스

몸서리치는 추위

 

밤 내 쌓인 눈 속에

노송 한 그루

몇 닢 솔가지로 추위를 털며

뼈의 힘을 우뚝 세워

동안거에 든다.

 

 


 

 

이길옥 시인 / 소리의 길

 

 

해발 650m 정상

건너편 더 높은 산이 부아를 지른다.

오기 발동하여

하늘 찢어지게 악을 써본다.

기가 살아 날개를 달고 날았던 악다구니가

덜덜 떨며 되돌아온다.

앞산의 큰 덩치에 야코죽었던지 아니면

그 산이 휘두른 주먹에 한 방 터진 게 분명하다.

떨림의 크기로 보아 당한 게 틀림없는데

잘도 돌아왔다.

악다구니도 다니는 길이 있나 보다.

실험 삼아 다시 한 번 울대에 힘을 넣어

앞산을 향해 날카로운 비명을 쏘아본다.

산의 심장에 명중할 줄 알았던 비명이

산의 두개골을 빠갤 줄 알았던 비명이

핏기 잃고 비틀거리며 되돌아온다.

맥 풀린 다리를 휘청거리며

창백한 얼굴로 돌아와 내 앞에 쓰러진다.

당해도 크게 당하고도 길을 잃지 않은

비명의 실체를 일으켜 세워놓고

소리의 길을 더듬어본다.

해발 650m의 정상보다 더 높은 산이 되돌려준

소리가 되어 소리의 길을 걸어본다.

 

 


 

 

이길옥 시인(필명: 돌샘)

1949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교육대학(국어전공). 1973 통일생활 신춘문예 시부 당선. 2006, 03 자유문예 시 부문 신인상. 교직 40년 퇴직(홍조근정훈장). 2007. 한국문학정신 광주 비엔날레 시화전 대상. 2008, 만다라 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8, 대한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 2009. 서정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9,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월간, 격월간, 계간 등 종합문예지 작품 다수 발표.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회원. 광주 시인협회 회원.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 정회원. 시집 - 하늘에서 온 편지. ‘물도 운다’, ‘出漁’ 외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