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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옥 시인 / 미처 못한 말 외 1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30.

이길옥 시인 / 미처 못한 말

 

 

간다하네요.

어허, 어쩔거나

간다하네요.

 

이유

없데요.

 

까닭도

없데요.

 

그냥

간다하네요.

 

해야 할 말

해야 할

사랑한다는 그 말

 

아직

못했는데

 

미쳐

못했는데.

 

 


 

 

이길옥 시인 / 바다와 숲

 

 

바람 소리가

나뭇잎에서 움질거리다가

하늘을 걸어 힘껏 치솟더니

늘 푸른 옷가지 몇 개를 벗어던지고

파도를 깔며 깨끗이 몸을 빨 때

악수의 근원에는 햇살보다 강한

연분의 빛이 응어리져 있다

골격마다 인연의 테를 두르고

젊음을 퍼내는 아량으로

육신의 한 자락에 곱게 다독였던

양심의 뿌리를 털어 주는 관용으로

억겁 세월을 인내해 오다가도

아픔을 찍어내는 울음은 더러 있다

울음의 내용에는

자학의 칼날과

끈끈한 체액에 젖은

그들의 생태가 겹겹으로 쌓여 있다

다 못한 발음을 더불어

살점 부스러기를 털어 내는 예지를 이끌고

싱싱하게 퍼덕이고 싶은 욕망 더미인 채

그들은 하늘을 베끼는데

바람 한 올이

파도를 빠져나와 나뭇잎에 걸리면서

잘 빨린 몸으로 휘파람을 불며

햇살을 접하고 있다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 수상)

 

 


 

 

이길옥 시인 / 바닷가 소곡(小曲)

 

 

사유(思惟)의 깊은 초록을

내닫는 배

돛을 올리어 하늘을 끌어들인다.

 

부푼 가슴을 열어

끌어들인 하늘로 뛰어오른 돛에

태양이 비스듬히 걸리고

 

갈매기, 자유의 손이 이정표를 대신한다.

 

하늘과 바다가 어울려 안부를 묻는

하늘이고 바다를 떠난 배.

 

해저 깊숙이 희망을 던져놓고

흥겨운 노래를 건져낼 거다.

질긴 운명을 건져낼 거다.

 

 


 

 

이길옥 시인 / 바람의 사생활

 

 

바람은 묘한 습성이 있어서

누구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합니다.

쥐죽은 듯 잠잠하다가도

이유 없는 성질 때문에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때 가끔 있어도

이놈은 참 재미있는 놈입니다.

빨랫줄을 타고 올라

여인이 속옷만 골라가지고 논다든가

예쁜 여인의 치맛자락 밑으로 기어들어

부끄러운 곳을 염탐하고

혼자 죽어 못 사는 놈이죠.

세상의 꽃이란 꽃은 다 건드려

발정 나게 하는 놈이기도 합니다.

이놈이 글쎄 기특하게도

후끈 달아오른 이마의 땀을 거둬가는

기술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이놈을 맘대로 부릴 수 없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의 행적이 오리무중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놈 기막힌 도사예요.

얼마나 큰 놈인지

어떻게 생긴 놈인지

아무도 모르게 제 혼자 사는

천하에 없는 귀신입니다.

 

 


 

 

이길옥 시인 / 법당 바깥쪽

 

 

시끌벅적하다

 

구린 냄새들이다

 

무슨 소원이 그리 많고 각각인지

부처님의 귀가 가렵다

 

체면 구기고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거나

조용히 해탈문을 열어

모두 끌어안고 싶은데

가부좌를 풀지 못해 안타깝다

 

온통 뒤숭숭하다

 

얽히고설킨 사연들로

부처님이 머리가 혼란스럽다

 

체통 버리고

법당을 내려서지 못하는

한숨 소리가

문턱을 넘어선다

 

 


 

 

이길옥 시인 / 변심

 

 

맘 속 깊이 감춰놓고

누가 알세라

조마조마 숨죽여 키워온

몹쓸 병의 도가니를 뒤져

잘 익어 홍시처럼 충혈 된

불신의 멱살을 잡아 꺼냈다.

 

멱살 잡혀

발버둥치는 불신에서

미움이 떨어진다.

 

곁에 기생하던

질투와 증오가 몸서리치더니

핏기를 잃는다.

 

같이 붙어 다니던 시기가

맥 풀리고 힘이 빠져

무릎을 꿇는다.

 

익어가던 화(禍)가 꼭지 떨어지고

그 자리에

보송보송 살 오르는 포근함이

너그러운 이불을 깔고 있다.

 

이불의 보풀에서 뾰쪽하게 싹을 내는

부끄러운 아량이

처음으로 남의 아픔에 눈여기더니

관심을 데리고 들어와

옹이로 박힌 독기를 부황 뜬다.

 

조금씩 속이 풀리고

사슬에 묶였던 관용과 배려가

서서히 몸을 풀고 용트림을 시작한다.

 

오만과 편견이 뿌리를 뽑아 털며

먼동을 불러 타고 화사하게 치장한 사랑 더미가

해일로 밀려와

후끈하게 불을 지른다.

 

불꽃의 열기에 데워지며

나도 사랑의 열병에 몸이 달아오른다.

 

 


 

 

이길옥 시인 / 봄

 

 

꽃샘추위에 밀리던 봄이

참고 있던 갑갑함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다.

 

양지쪽 언덕을 밟고 오르며

쑥부쟁이 달래 냉이의 잠을 깨고

종달새 부리에

최신 유행가 한 가락 물려준다.

 

바람을 얼리어 타고

꽃눈, 겨울눈을 건들고 논다.

 

노곤하고

나른하게 풀린 몸으로

공원 벤치에 신세를 지고 있는 할아버지

무거운 눈꺼풀에

낮잠도 한 종지 얹어준다.

 

웃음을 못 견딘

개나리 진달래 밭에 들어

같이 웃어주고

 

매화 산수유와 벗하더니

벚꽃 그늘에서

화르르화르르 꽃나비가 된다.

 

 


 

 

이길옥 시인 / 봄 앓이

 

 

마음씨가 물컹하여

조금 큰 목소리에도 눈치 앞세우는

그래서 늘

뒷전에서 투덜대기 일쑤이던 친구가

나를 불러낸다.

 

아직

냉기가 바닥을 훑고 있는 허름한 술집

삐거덕 관절통을 앓고 있는

낡은 나무의자에 기대앉은 친구의 눈이 풀려있다.

 

찌그러진 양은 잔 밑바닥에 깔린 막걸리

뜨물 같은 색이

희끗희끗 탈색되고 있는 친구의 코 밑 수염에 달라붙어

입을 들썩일 때마다 위기를 넘기고 있다.

 

술기운이

친구의 간덩이에 불을 질러

무르디무른 성정을 건들자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불만이 일제히 일어서서

길길이 날뛰며 목소리에 힘을 심는다.

 

씨에서 싹이 나듯

마른 가지 끝에 새싹이 돋아나듯이

지금

친구는 막걸리의 위력으로

나약한 성깔에 새순을 내고 있다.

 

 


 

 

이길옥 시인 / 봄 이야기

 

 

가지에 오른 물이

꿈을 차고 돋아날 때

해가 눈 못 뜨는 웃음으로

부른 배를 움켜쥐는 아침 길을

돌 지난 막내 놈이

위태위태

아지랑이 숲을 헤치며

봄의 살을 뒤지고 든다.

 

엄마의 품속이듯

훈훈한 바람 속에서

더러는 상기된 채

웃음 밭에 넘어지며

민들레를 건드려보고

나는 새와 교신도 한다.

 

막내 놈의

위태로운 걸음마에 걸린 봄이

알몸을 드러내고

깃발처럼 펄럭이며

풍금 소리를 내고 있다.

 

 


 

 

이길옥 시인 / 봄에만 앓는 병

 

 

해빙의 바람이 물 오른 가지에 걸려 속삭이면

속 깊은 마음들이 움질거린다.

아직은 시작도 못한 출발을 위하여

가슴 뭉클한 멋 한 줌 들고

축제에 초대나 같은 두근거림을 누르며

집착의 눈들을 닦기에 열중인 꿈을 던져

온 힘을 다 쏟는 정력.

거기

불빛처럼 환한 기대가 담기고

물기 젖은 전신에 싹이 베인다.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하늘과

자유스런 내 사념思念이

취기醉氣에 질질 끌려 질서 밖을 맴돌고

땅속에서 들리는 비명이

사념의 가장 아픈 곳을 뒤흔든다.

아, 체온이 새어나는 치장마다

봄이, 봄들이 끼어든다.

욕망의 시선마다

투지의 등피를 씻어내는 이맘 때 쯤

내 거대한 욕정은 쓰러지고

아픔을 달랠 손마저 없다.

줄줄이 탄생하는 대열에 끼어

발목을 드리울 땅에

차라리 씨를 뿌리지 말기를 원하는 이별.

돌아선 이별의 흐릿한 기억을 깨고 보면

천연스럽게 돌아온 봄이 무섭다.

몹시도 짜증스런 위안을 위해

질펀히 쏟아지는 봄비

그 속에 약속도 없는 의지마다 시간이 흐르고

내 서정抒情의 손끝에 걸린 오한惡寒이

진한 병의 계곡에 결려 술을 청하면

전신을 파고드는 기력의 눈들.

아, 지열地熱이 던진 그물 속에 싸여 움질거리는

욕망의 눈들이

하나둘씩 태양을 보듬어 서고

나의 가녀린 음반 위에 내린 혀는

병색病色 짙은 노래를 부른다.

봄에 잃은 이별의 상처 속에

나의 혀는 이맘때면 꼭 병을 앓는다.

 

 


 

 

이길옥 시인 / 봄의 소리

 

 

귀가 밝으면

우린

세상의 모든 소릴 들을 수 있다.

 

태양의 웃음을 받아

새싹을 부르고 있는

바람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

 

서툰 비상을 시도하는

첫 나들이의 나비 날개에 묻어나는

기쁨의 환호

 

자운영꽃을 밟고

하늘을 걷어 오르는

아지랑이 발걸음 소리

 

동면(冬眠)의 창을 뜯고

물을 물어 깨는

개구리의

꽈리 부는 소리에

나는 마냥 붙들리고 있다.

 

유독

봄의 귀틀엔

여러 소리들이 어울려

즐거운 음악으로 빗질 되며

귀에 잡힌다.

 

 


 

 

이길옥 시인 / 봄의 유혹

 

 

하늘이 몸을 푸나 보다

쌀쌀하던 날씨가 나른해지고 있다.

 

얼었던 소리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한 계단씩 높은 음으로 일어선다.

 

웅크려 잠들었던 것들도 덩달아

뻐근한 뼈마디 녹을 털고

우지직 기지개를 켜는 사이

자기 끝에서는

설렘이 피돌기를 시작한다.

 

땅이 뚫리고 있다.

가장 연한 돋음에도

땅은 말없이 몸을 열어주고 있다.

 

봄에만 일어나는 일들이

왁자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입만 찢어지게 벌리고 숨 가빠한 채

정신을 잃고 있다.

 

 


 

 

이길옥 시인 / 봄의 해찰

 

 

조금 참으란다.

 

넉넉한 여유에서 게으름이 터져 나온다.

 

발길에 달라붙은 꽃샘추위를

툴툴 털며 한참을 서 있다가

강남을 무질러온 바람을 만나 얼싸안고

서로 등을 토닥거리며 놀고 있다.

 

한참을 신 나게 놀던 바람이

살짝 몸을 뺀 자리가 허전하다.

 

버들가지 끝

탱탱 불은 망울이 젖몸살로 진땀을 흘려도

봄은

느긋하다.

 

서두르는 법이 없다.

 

강물도 한 번 짚어보고

양지쪽도 한 번 둘러보고

산비탈에서 미끄럼도 타보고

천천히

뒷짐 지고 팔자걸음으로 온다.

 

 


 

 

이길옥 시인 / 불임의 강

 

 

빗물이 구불구불 S자로 고랑을 내고 흐르며

나를 부른다.

따라가자 한다.

호기심을 데리고 망설이는데

다른 데서 흘러든 물이 몸을 합쳐 굵어지더니

제법 힘깨나 쓴다.

골이 커지고 깊어지는가 싶더니

바닥의 굵은 자갈을 일으켜 세운다.

 

한참을 주저하다가

꿈틀거리는 물길에 끌려

아래로, 아래로 휩쓸린다.

비비 꼬이며 뒤틀리는 것도 보고

어지럽게 휘몰아치다 맥 풀리는 것도 보고

 

더하고 보태어 굵어질 대로 부푼 강

굽은 허리 쭉 펴고

콘크리트벽으로 숨통이 막혀 있는 강

풀 한 포기 뿌리 내리지 못하는 곳에

같이 가보자 하던

함께 흘러보자 하던 물의 한숨

 

뛰어오르던 피라미

떼 지어 꼬리 치던 송사리 모두

불임으로 대가 끊기고 있는 강의 끝자락까지

끌어낸 이유에 녹조가 낀다.

 

 


 

 

이길옥 시인 / 불장난

 

 

내장산에 불이 났다.

 

산이 온통 불바다다.

이맘때만 되면

하느님은 손이 간지러워 참지 못하고

내장산에 내려와

불을 질러놓고 좋아라 한다.

 

구경 중에

싸움구경 다음으로 좋은 게

불구경이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불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다

다 타지 않을까 두렵다.

 

하느님도

참,

장난기가 심하다.

불장난을 다 하고.

 

 


 

 

이길옥 시인 /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가슴에 깨지지 않는 독 하나 들여놓고

아무도 모르게

기쁘고 즐거울 때

외롭고 허전할 때

쓸쓸할 때

슬프고 서러울 때

아니

그냥 아무 때나

가슴 저며 솟은 눈물을 가두었다.

 

넘치면

감당 못할 일이라

진국만 걸러 넣었는데도

목까지 차올라

더는 견디기 어려워

갑갑하고 속 터지는 울화로 차올라

 

 


 

 

이길옥 시인(필명: 돌샘)

1949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교육대학(국어전공). 1973 통일생활 신춘문예 시부 당선. 2006, 03 자유문예 시 부문 신인상. 교직 40년 퇴직(홍조근정훈장). 2007. 한국문학정신 광주 비엔날레 시화전 대상. 2008, 만다라 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8, 대한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 2009. 서정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9,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월간, 격월간, 계간 등 종합문예지 작품 다수 발표.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회원. 광주 시인협회 회원.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 정회원. 시집 - 하늘에서 온 편지. ‘물도 운다’, ‘出漁’ 외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