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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수천 시인 / 늦가을 들판에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29.

윤수천 시인 / 늦가을 들판에서

 

 

다들 돌아가는구나

풀도 벌레도 다들 돌아가는 구나

 

풀들의 집은 어디일까

벌레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우리도 돌아가고 싶구나

따뜻한 등불 하나 켜놓은 집

그립구나

 

 


 

 

윤수천 시인 / 면도를 하면서

 

 

아침마다 수염을 깎는 이 즐거움

나도 한 나라를 정벌할 수 있고

새로운 땅에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이 유쾌함

 

나는 오늘도 나의 나라를 세운다

청청한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말한다

 

불의는 가라 불의는 가라

정의와 도덕의 나라를 세우리라

 

나는 오늘도 수염을 깎으며

새로운 나의 나라

자유가 초원처럼 펼쳐진

그 융성의 나라를 세운다

 

 


 

 

윤수천 시인 / 목숨을 거는 사랑

 

 

사는 일은 무서움이다.

사랑도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사랑을 흉내낼 뿐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

그런 후에 다들 모여서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후회스러운 부끄러움이여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삶도 진실일 수 없다.

 

목숨을 걸어본 경험 없이는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윤수천 시인 / 바람 부는 날의 풀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윤수천 시인 /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밥 한 그릇을 비우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채워 주고 싶다는 것

밥은 곧 마음이다.

 

 


 

 

윤수천 시인 / 봄 아침

 

누가 오려나 보다.

 

들판 가득

푸른 바람이 분다.

 

산등성이엔

해가 오르고

 

그 해를

가슴으로 받는 나무 가지들.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분명

오긴 오려나 보다.

 

 


 

 

윤수천 시인 / 사막

 

그곳에 가면 별을 볼 수 있다.

그곳에 가면 더 맑은 외로움을 만날 수 있다.

모래뿐인 땅

아득한 지평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올 수 있는 나라

모든 것을 다 잊고 올 수 있는 나라

그곳에 가면 맑은 영혼을 만날 수 있다.

별처럼 맑은 나를 만날 수 있다.

 

 


 

 

윤수천 시인

1942년 충북 영동 출생. 경기도 안성에서 자람. 국학대학 2년 수료. 1974년 소년중앙문학상 동화 당선.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집 '아기넝쿨', '겨울 숲', 동화책 '꺼벙이 억수',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나쁜 엄머', 시집 '쓸쓸할수록 화려하게', '빈 주머니는 따뜻하다', 발간.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수상. 초등학교 4-1 국어활동 교과서에 동화 <할아버지와 보청기>수록. 현재 수원문학 고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