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임 시인 / 나무그림자
햇빛 밝은 건물 안 대리석 바닥에 한 폭 그림이 걸려있다 창밖 나무들이 들어와 색 없는 그림자로 서 있다
내가 나의 색을 지운
저들의 투명함이 그윽하다
색을 지워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는 넘지 못할 벽은 없다는 것을 눈앞에 보이는 벽은 단지 보이는 것일 뿐 넘어서고자 하는 이에게는 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래도록 저 그림자를 보고 있는 나는 저 색 없는 한 폭 그림이 네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내게 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한 줄 메시지를 전하는 것만 같은데 색이 너무도 뚜렷했던 나는 그 강렬한 고집을 지우지 못해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폭우와 불볕더위를 온몸에 받았다 견딜 수 없는 그 시간이 온통 얼굴 붉게 물들게 하는 서릿바람을 불러와 내 안에서 다시 내뿜게 하였다
저 콘크리트 건물 안을 온통 평온으로 채우고 있는 수묵화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밝히는 그림은 명화(名畵)다
너에게로 들어가는 길을 찾은 그림자 하나 건물 밖을 걷는다 거리에는 색을 지운 색 없는 색을 막는 벽들이 없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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