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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임 시인 / 나무그림자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29.

서정임 시인 / 나무그림자

 

 

  햇빛 밝은 건물 안

  대리석 바닥에 한 폭 그림이 걸려있다

  창밖 나무들이 들어와 색 없는 그림자로 서 있다

 

  내가 나의 색을 지운

 

  저들의 투명함이 그윽하다

 

  색을 지워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는 넘지 못할 벽은 없다는 것을

  눈앞에 보이는 벽은 단지 보이는 것일 뿐

  넘어서고자 하는 이에게는 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래도록 저 그림자를 보고 있는 나는

  저 색 없는 한 폭 그림이

  네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내게 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한 줄 메시지를 전하는 것만 같은데

  색이 너무도 뚜렷했던 나는

  그 강렬한 고집을 지우지 못해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폭우와 불볕더위를 온몸에 받았다

  견딜 수 없는 그 시간이 온통 얼굴 붉게 물들게 하는 서릿바람을 불러와

  내 안에서 다시 내뿜게 하였다

 

  저 콘크리트 건물 안을 온통 평온으로 채우고 있는 수묵화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밝히는 그림은 명화(名畵)다

 

  너에게로 들어가는 길을 찾은 그림자 하나

  건물 밖을 걷는다

  거리에는 색을 지운

  색 없는 색을 막는 벽들이 없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발표

 

 


 

서정임 시인

2006년 《문학·선》으로 등단. 2012년 문예진흥금수혜. 시집으로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