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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옥 시인 / 동반자 외 1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29.

이길옥 시인 / 동반자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서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수시로 기웃거리는 불안이 싹을 자르고

총기를 발동시켜

숨어 있는 안심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더니

웃음을 꺼내어 질펀하게 엎질러놓는다.

 

웃음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자지러진다.

얼씨구

기쁨이 더덩실 어깨춤에 흥겹고

절씨구

딱딱하게 굳은 내 고집이 풀린다.

 

그녀가 염려에 불을 지른다.

불빛이

덜컥거리는 길 앞에서

궤도 이탈을 막아선다.

 

깜박 헛눈을 파는 사이

그녀는

이정표로 일어나

내 눈에 끼인 백태를 걷어내고

맹목적의 굽은 길을 고치고 있다.

내 눈에서 어둠이 떠나고 있다.

 

 


 

 

이길옥 시인 / 동백 숲

 

 

해가 바다에 빠져 자맥질을 하다가

끓는 열로 동해를 데우더니

불쑥 얼굴을 내밀고

환하게 웃음보를 풀어헤친다.

웃음의 파편들이 심장을 관통한 화살처럼

불꽃으로 튄다.

몇 개의 불똥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뛰쳐나와

불티 되어 난다.

불티 속에 살아 꿈틀대던 불씨가

어디라도 확 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충혈 되어

몸부림을 치다가

동백 가지를 잡고 헐떡거리며 피곤을 내려놓는다.

잠깐 사이

가지마다 불이 붙는다.

선혈을 쏟듯 서서히 불바다가 된다.

우와 나도 타겠다.

 

(만다라문학 신인상 수상작)

 

 


 

 

이길옥 시인 / 또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만 일어서려는데

허리춤을 잡고 늘어지는 그놈의 ‘한 잔만 더’가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맙니다.

 

한계를 넘은 한 잔에 눈꺼풀이 풀리고

동공에 노을이 깔립니다.

 

눈동자가 흐려지며

초점을 놓치자 형체들이 허물어지고

흐물흐물 뭉개진 윤곽들이

기억을 데리고 자리를 뜹니다.

 

충동 억제를 못 한 그놈의 한 잔 더에

몸이 무너지고

혼이 붕괴되어 중심을 잃자

끊어진 정신줄 틈으로

어둠이 밀려와 기억을 덮어씌운 뒤

당당하게 버티고 섭니다.

 

깨지려는 머리를 감싸 쥐고

덜 풀린 술기운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더듬는데

아내의 토끼 눈에 선 핏발이 불꽃을 냅니다.

 

작심삼일

 

또 약속을 허물고 말았습니다.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길옥 시인 / 들꽃-2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애써 찾아주지 않아도

소박한 여인의 수줍음으로

눈에 보일 듯

엷은 미소하나 꺼내 든다.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아도

힘든 발길 주지 않아도

서운함을 몰아내고

수수한 몸치장으로

속 깊은 웃음 하나 밀어낸다.

 

척박한 돌 틈에서도

그늘 짙은 외진 곳에서도

숱한 발길에 맥을 못 추면서도

끈질긴 생명력 하나로

당당하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화려하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다.

 

왜소하여 보잘것없는 몸매여도

혹한 된서리를 건너

폭염 목마름도 견디어낸 뿌리의 근성으로

가슴에 불 지르는 기쁨이 돋아

화사한 웃음을 퍼내고 있다.

내일을 엿보고 있다.

 

 


 

 

이길옥 시인 / 마음의 넋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 좋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어 좋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어 더욱 좋다.

 

물 밖에 난 생선처럼 헉헉 숨이 차게

정상에 올라

하늘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 감으니

바람이 비단을 풀어 감싸며 속삭인다.

 

비단의 보풀로 흔들리는 이야기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며

헤집고 온 세상 구석구석의 소식을 털어놓는다.

 

그래그래, 고개 끄덕여주고

맞다 맞아, 맞장구쳐주고 나니

산이 나를 끌어안고 하소연한다.

 

죽어 오는 자 가슴 열어 안아주고

살아 찾는 자 등허리 내주다 보니

죽음의 이유가 모래알이고

사연 또한 밤하늘의 별의 수를 넘어

말문을 닫고

속에 감춘 말 메아리로 대신한다는 넋두리에 동참하고

발길 돌려 신발 끈 조이는데

길이 통증을 앓으며 나를 잡는다.

 

죽도록 밟힌 후유증으로

골수에 천둥 치는 심한 신경통에 걸려

완치할 약을 구할 수 없어 속만 터진단다.

 

 


 

 

이길옥 시인 / 말도 안 되는 소리 (4)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어려운 시를 읽고

그 시 참 잘 썼다.

마음에 쏙 들어 가슴 뭉클하다 하는 말

 

매운맛에 혀가 불타오르고

끓는 국물로 땀범벅이 된 얼굴 훔치며

어, 시원하다 하는 말

 

딴 여자와 배를 맞춘 남자나

외간 남자의 밤꽃 냄새에 넋 잃은 여자가

집에 돌아와

당신밖에 없어 하는 말

 

좌판 위에 골골하게 썩어가는 생선

떼거리로 달라붙은 파리 날리며

물 좋다 하는 말

 

가진 것 넘치는 분

삼일 굶은 친구 앞에서

요즘 잘 안 돌아가 미치겠다는 말

 

결혼 전

여자 앞에 무릎 꺾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 말

 

百壽가 눈앞인 할머니

백발 침 발라 다듬으시며

죽어야 해 하시는 말

 

 


 

 

이길옥 시인 / 망상(妄想)

 

 

잘 나가다가

삐끗 어긋난 틈에

쐐기가 박히면

허탈감을 풀어놓고 사뭇 심각해진다.

 

내일을 열어보지 못 하는 무지와

앞날의 두려움에 눌린 채

안개에 묻힌 고운 꿈을 캐낼

무딘 호미 한 자루 장만하지 못 하는 무능으로

탓만 하고 산다.

 

욕심만 가득 채운

시커먼 속마음에서 솟는 구린내가

추억에 빠져 허우적이고 있다.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오늘도 감각 잃은 더듬이에

나를 떠나 흔적마저 지워진

지난 일의 꼬투리를 잡아 걸며

자제력을 놓친 채 눈이 먼다.

 

 


 

 

이길옥 시인 / 멀어지는 이유

 

 

내가 변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옛날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담배 끊고

술 멀리한 뒤부터

콩나물처럼 쑥쑥 자란 입방아들이

나를 가만 놔두지 못하고 요동을 친다.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면

배신자가 되고

약속에 늦으면

이미 난도질로 자존심이 망가진 뒤다.

 

뭉개져 짓밟혀 뭉개진 고행도

귀 밖으로 밀려나 이유 없음이다.

 

진실 이해에 인색한 무리

믿음의 물이 빠져 빳빳해진 관용의 뼈에

시뻘건 녹물 번지는 가시방석에서

견딜 재간 잃고 일어서는 관절이 경련을 일으킨다.

 

눈여겨 잡아주는 이 없는 어처구니

배 앵

하늘이 도는 현기증을 잡고 소스라치며 관계 접는다.

오기 발동이다.

 

 


 

 

이길옥 시인 / 명문장에 사로잡히다

 

 

오래 방치해두고 관심 버렸던 책을 펴자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문장이 불쑥 튀어나와

눈 속에 둥지를 튼다.

 

형광펜을 찾아 밑줄긋고

몇 번을 더 읽어본다.

 

마음을 사로잡는 절묘한 표현

짜릿하게 감전되는 전율의 파장으로

온몸이 달아오르고 열꽃이 핀다.

 

책장을 넘기거나

책을 덮으면 금방 기억에서 지워질 것 두려워

넘길까 말까

덮을까 말까

초조하고 불안한 망설임의 그물에 갇힌다.

 

북 찢어 삼키고 싶은 충동 눌러 책갈피에 넣고

반듯하게 펴

몇 날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보고 또 볼 것이다.

 

 


 

 

이길옥 시인 / 몹쓸 짓 천지인 세상에

 

 

좋은 일들과

연을 잘 맺어야

답다고 하는데

 

눈에 드는 멋스러움으로

잘 길들여져야

알차게 여물었다 하는데

 

대명천지에 널린 짓거리들이

눈엣가시로 덧나

골치 덩이로 방해꾼이니

어디에 맘 내려

편히 쉬어볼꼬

 

흥부 같은 놀부들 판에

질펀하게 퍼질러 앉은

몹쓸 짓거리들이 허물을 벗고

날카롭게 갈라진 두 혀로

농간을 부리고

 

천사 같은 악마들 속에

눅눅한 구석을 찾아 곰팡이로 기생하는

천하에 몹쓸 짓거리들의 꼬챙이에 낀

내 가련한 몸 데려다

어디에 자리 펴 뉘어볼꼬

 

 


 

 

이길옥 시인 / 무죄(無罪)- 차를 우리며

 

 

엄동의 가시에 찔려

몸서리치고

 

혹한의 매질에

치도곤당하다가

 

봄볕의 치마폭에 싸여

살며시 뜬 눈

꺾이는 아픔도 참았는데

 

다시

서너 번 뜨거운 곡예로

몸 비틀리고

 

손아귀

힘살에 비벼지다가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번 데워지는 수모를 견딘 뒤에야

비로소

끝인가 싶었는데

더운 물에 던져 넣고

향을 짜내라 한다.

맛을 토하라 한다.

 

 


 

 

이길옥 시인 / 물도 운다

 

 

그날 나는 물도 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밀리다가

아찔한 현기증이 핏대를 세우는 낭떠러지에 도달해서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퍼내는 것을 보았다.

울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진 울음이 거품을 물고 뒤틀리다가

돌 틈에 끼어 이끼의 품속을 더듬다가

부르르 몸서리치면서 자꾸 떠밀려가면서

서러움을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씹힌 서러움 몇 개가 물방울로 튀어 올라

햇살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물은 통곡하다가

시퍼렇게 멍이 든 가슴을 다독여

울음을 삭이고 있었다.

 

 


 

 

이길옥 시인 / 물의 가르침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겉으로

가장 깨끗한 척하면서

속으로

가장 더러운 자

 

남 앞에서

최고로 결백한 척하면서

등 돌리면

최고로 구린 자

 

물을 봐라

 

물은

자신이 몸으로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을 껴안고도

결코 티를 내지 않는다.

물은

기름 덩이에 숨 막히면서도

절대 기름을 탓하지 않는다.

 

강한 햇볕에 데워져

잠깐 몸 감추었다가도 돌아와

다시 헌신할 뿐이다.

 

 


 

 

이길옥 시인 / 물의 길 2

 

 

물이 한사코 구부러지기를

고집하면서

구불구불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

꼿꼿하기보다 약간 휘어지기도 하고

가슴을 넓히다가

굽어 흐르면서 웅덩이도 만든다.

넉넉한 마음으로 물풀을 끌어들여

피라미 붕어 집도 지어준다.

갈대나 줄 부들도 불러들여

끌고 오던 오물을 건네주면서

자기 몸을 깨끗이 씻기도 한다.

물을 절대 거꾸로 오르는 법이 없다.

순리에 따르고

섭리에 이끌리면서

자연과 한몸이 된다.

인간의 무지가

낭창낭창 휘어지는 물의 길을

막아서서 재해의 씨를 뿌리는 날

물은 버럭 화를 낸다.

굽은 길을 바로잡는 미련에

반드시 화풀이를 한다.

물은 기어이 굽어 흐르기를 우기면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길옥 시인 / 물의 본향(本鄕)

 

 

虛空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그의 母胎였다.

 

눅눅한 몸체

끈적거리는 불쾌감

칭칭 감고 도는 축축함

말려 몸 숨기고

원 없이 쏘아다니다가 만난

섬뜩한 찬기에 들통 나

으스스 몸을 털고 드러낸

아,

투명함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天空이었다.

휘저어도 걸리는 것 없는

텅 빈 하늘이 그의 安胎였다.

 

둥둥 떠다녀도

그가

최초로 뿌리내린 자리였다.

싹을 틔운 터였다.

 

 


 

 

이길옥 시인 / 물의 전언

 

 

냄비에서 물이 끓으며

뜨겁다고

너무 뜨겁다고

온몸을 뒤틀고 비비꼬며

말문을 튼다.

 

덮었던 뚜껑을 들썩이며

속에 담은 본심을 뜨겁게 헐떡이며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세상살이는

불 맛을 봐야 익는 거라고

펄펄 끓으면서 맛이 드는 거라고

 

화상을 입을 정도는 되어야

남을 꿇릴 수 있다고

화끈하게 데워지라 전한다.

 

 


 

 

이길옥 시인(필명: 돌샘)

1949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교육대학(국어전공). 1973 통일생활 신춘문예 시부 당선. 2006, 03 자유문예 시 부문 신인상. 교직 40년 퇴직(홍조근정훈장). 2007. 한국문학정신 광주 비엔날레 시화전 대상. 2008, 만다라 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8, 대한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 2009. 서정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9,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월간, 격월간, 계간 등 종합문예지 작품 다수 발표.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회원. 광주 시인협회 회원.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 정회원. 시집 - 하늘에서 온 편지. ‘물도 운다’, ‘出漁’ 외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