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덕하 시인 / 고행(苦行)
갑오년 오월 길동무 둘이 길 잃었다 모두 신을 찾아 떠난 거리 말더듬듯 나무마다 흰 소금밥 얹은 일요일 아침
가야 할 길 묻지만 오토바위에 앉은 사람 말 없다 갈 곳 없는 사람이 갈 곳 있는 사람 보면 할 말 없어지는가 오토바위에 앉은 사내 심우도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 그 자리에 멈춰있으나
우리는 버스 대신 걷기로 했는데 그날처럼 섬이라 생각하고 물어물어 가면 배를 탈 수 있기 바라며 아직도 비린내 나는 과거 짊어지고 걷는 길이기에
발바닥에서 몸속으로 고루 퍼지는 해장술 같은 햇살 탓인가 그늘이 두 가슴 찌른다 그늘 찾던 사람들 안색 여적 남아 있는
일요일 아침이여 빈 운동장 걸어가는 하릴없는 두 눈동자여 무량한 바람도 아프다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구석이 앓고 있다 지정된 곳에서만 저쑵는 애도를 뒤로 밤사이 서둘러 자리를 뜬 혼들이여
공교롭다 맑은 날에 흐린 마음들 자욱하게 피어나는 길가엔 그날처럼 귀만 무성하게 자라 풀씨 까맣게 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고
상점들 모두 문 닫았다 안은 검은 상복 입고 어두워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문이 쾅하고 닫힌다 호렴 뿌린 듯 오갈 데 없다 플래카드에 몇 마디 할 말 얹으며 그저 걸어가는 것인데
그토록 오래 머물렀으나, 가도 가도 제자리인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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