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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수천 시인 / 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31.

윤수천 시인 / 시

 

 

사람들이 친할 수 있으려면

뭐라도 한 가지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은

글을 밥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런 원고지를 퍼런 지폐보다도 더욱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닌 남들이 본다면

우리는 참 한심스러운 사람들이다

 

밥이 되지 않는 시

돈은 더더욱이나 되지 못하는 시를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시는 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밥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돈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시는 아름답다

새나 꽃처럼 아름답다

 

시는 밥이나 돈은 되지 못하지만

새나 꽃이 되기 때문에 아름답다

 

 


 

 

윤수천 시인 / 시간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죄가 아니다

시간을 허비한 것도 죄가 된다

빠삐용이 죽음 직전까지 가서

깨달았던 것도

시간을 허비한 것에 대한 낭비죄였다

 

내일은 언제나 올 것 같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최선이란 말이다

 

 


 

 

윤수천 시인 / 시시한 말

 

 

나이 들어 보니

중요한 말보다는

시시한 말이 자꾸 좋아져

 

차 한 잔 할까?

얼굴 한 번 봐야지?

 

특별히 무슨 용무가 있지도 않은

그냥 지나는 말처럼 들리는 그런 말들

 

내일은 뭐해?

글 좀 쓰나?

 

굳이 궁금할 것도 없는

그냥 한번 해보는 말처럼 들리는

그런 말들

 

 


 

 

윤수천 시인 / 아내

 

 

아내는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억울하다며 나를 돌아다본다

아무개 집안에 시집 와서

늘은 거라고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과

하얀 머리카락뿐이라고 한다

 

아내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모두가 올바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슬그머니 돌아앉아 신문을 뒤적인다

 

내 등에는

아내의 눈딱지가 껌처럼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잠시 후면

아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딱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환하도록 문지르고 닦아

윤을 반짝반짝 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윤수천 시인 / 아름다운 아내

 

 

아내여, 아름다운 아내여.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어도

변치 않고 살아주는 아름다운 아내여.

 

세상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좀처럼 절망하지 않는

나의 아름다운 아내여. 방파제여.

 

당신은 한 그루 나무다.

희망이라는 낱말을 지닌 참을성 많은 나무다.

땅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는 억척스런 나무다.

 

아내여, 억척스런 나무여.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언제고 믿는 아름다운 나무여.

나의 등이 되어주는 고마운 나무여.

 

아내는 방파제다.

세월 속의 듬직한 나무다.

 

 


 

 

윤수천 시인 / 아름다운 이별

 

 

우리는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오래 빛날 수 있다.

 

저 높은 곳의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더욱 확실할 수 있다.

 

누가 이별을 눈물이라 했는가

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빛날 수도 없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빛나는

이별은 인생의 보석이다.

 

헤어짐을 서러워하지 말라

이별은 초라하고 가난한 인생에

소중하고 눈부신 보석을 붙이는 일

 

두고두고 빛날 수 있는

사랑의 명패를 다는 일

 

 


 

 

윤수천 시인 / 여름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뜨거운 폭양 속으로

피라미떼 하얀 건반처럼 뛰어 놀던

그 시냇물

악동들 물장구치던 그 여름 속으로

 

뜨거운 맨살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악동들 다시 불러모아

온 산천을 발칵 뒤집어놓고 싶다

매미들도 불러다가

한바탕 축제를 열고 싶다

 

쇠꼬챙이처럼 내리꽂히는 불볕화살

가마솥 같은 여름 한낮에

온몸 열어 태우고 싶다

온갖 세상의 땟자국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다

 

 


 

윤수천 시인

1942년 충북 영동 출생. 경기도 안성에서 자람. 국학대학 2년 수료. 1974년 소년중앙문학상 동화 당선.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집 '아기넝쿨', '겨울 숲', 동화책 '꺼벙이 억수',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나쁜 엄머', 시집 '쓸쓸할수록 화려하게', '빈 주머니는 따뜻하다', 발간.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수상. 초등학교 4-1 국어활동 교과서에 동화 <할아버지와 보청기>수록. 현재 수원문학 고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