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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철 시인 / 기착지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31.

이병철 시인 / 기착지

 

 

  문을 열면 연양갱 같은 사각형 어둠이 나프탈렌 냄새를 풍겼다 그 속에서, 죽은 계절들은 썩지 않고 부활을 기다렸다 문을 닫으면 열쇠구멍으로 들어오는 실빛이 내가 살던 세계와 종이컵 전화를 연결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방이면서 관이기도 한 공간, 삶도 죽음도 자라지 않는 기착지

 

  따뜻함과 차가움의 중간, 냄새와 향기의 중간, 어둠과 빛의 중간…… 나는 몸을 웅크렸다

 

  도망칠 수 없는 이의 오래된 습관이자 심판을 유보 받은 자의 자세,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허밍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코트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내가 갈 수 없는 나라의 대로가 되어 뻗어 나왔다

 

  털옷을 입은 사람들이 기나긴 겨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기에, 그들을 따라가려면 숨을 참아야 했다 호흡을 참을수록 보푸라기가 폭설로 달라붙었다 내가 삼킨 겨울이 뱃속에서 좀약으로 굳어갈 때

 

  종이컵 전화가 울렸다

  문이 열렸다 거울 하나만이 서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2월호 발표

 

 


 

이병철 시인

2014년 《시인수첩》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