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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유라 시인 / 한라봉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31.

박유라 시인 / 한라봉

 

 

  마고할미 밤새 짜디짠 울음 울고

  목뼈 한 도막 허공에 깊숙이 걸어두었네

 

  새벽 능선 그 아래

  갈증으로 부풀어 오는 한 점 붉은 기운

  점점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라

 

  가물가물 깃대 하나 꽂힌 그곳에서부터

  봄 보리밭은 종일 고랑을 지어 흘러내리고

  하얗게 쇤 길을

  태풍의 먼 끝자락으로 불려가는 나뭇잎처럼

  할미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네

 

  넘칠듯 한 잔 가득 찼던

  제주산 귤 음료

  유리잔 하늘 끝에서 끝까지

  구름을 뿌려 얹어 아슬아슬

  드디어 저녁에 닿아

  서쪽 창에 엎질러졌네

 

  흘러내린 시간들

  남쪽 창가에 남천 두 그루

  잎잎이 붉게 물들 동안

  머나먼 변방 녹슨 철교 위로

  기차소리 잠시 지나갔을까

 

  엎질러진 음료

  얼룩진 오늘이 흘러 가고나면

  갈증 한 모금으로 내일은 또 부풀어 올 것이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발표

 

 


 

박유라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87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야간병동』, 『갈릴레이를 생각하며』, 『푸른 책』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