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천 시인 / 우산 하나
비오는 날에는 사랑을 하기 좋다 우산 한 개만으로도 사랑의 집 한 채 지을 수 있으니까....
윤수천 시인 / 인생이란
남기려고 하지 말 것
인생은 남기려 한다고 해서 남겨지는 게 아니다
남기려고 하면 오히려 그 남기려는 것 때문에 일그러진 욕망이 된다
인생이란 그저 사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 아니다
윤수천 시인 / 전기밥솥
둘이 사는 집엔 전기밥솥이 딱이다. 밥솥에 쌀 넣고 물 붓고 딴일 좀 하다 보면 어느새 다 됐다고 신호를 보낸다.
참 고마운 밥솥
이젠 한 가족이 되었다. 요 예쁜 딸아.
-2020년 2월 10일 (월) 중부일보
윤수천 시인 / 짧은 시간을 길게 만드는 그리움
내 마음속의 그리움을 살짝 꺼내서 길게 늘어뜨리면 어디까지 가 닿을까 은하수에라도 가 닿으면 작은 배를 띄우고 목청껏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 사람의 생애는 가슴 떨리는 그리움의 길이만큼 행복하다고 하는데
짧은 시간 속에서 만드는 우리의 그리움 그리움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애
내 마음속에 숨어있는 그리움의 길이는 도대체 어느 만큼일까
한 사람의 생애는 가슴 떨리는 그리움의 길이만큼 행복하다고 하는데..
윤수천 시인 / 파도는 왜 아름다운가
내가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다. 내 몸을 둘둘 말아 파도를 만들어 끝없이 끝없이 부서지는 일 곤두박질을 치며 부서지는 일
파도는 부서지고 싶다. 차라리 닳아지고 부서져 아름답고 싶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므로
윤수천 시인 / 할머니는 바늘구멍으로
할머니가 들여다보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잖는데 할머니 눈에는 다 보이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실끝을 곧게 세우고는 바늘에 소리를 다는 할머니 손
밤에 보는 할머니의 손은 희다. 낮보다도 밝다.
할머니가 듣고 있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소문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잖는데 할머니 귀에는 다 들리나 보다.
윤수천 시인 / 항아리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항아리 속에서는 구름이 떠간다.
꽃구름 뭉게구름 소나기구름.
아무도 없는 데도 항아리 속에서는 무슨 소리가 난다.
꽃잎 눈뜨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때론 수수밭을 서성이는 그 달빛 소리.
누가 맨 처음 항아리 빚는 것을 알았을까.
별이 우쭐대는 밤이면 나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빨간 불더미에서 흙을 주무르시던 그 불빛 손.
할아버지 생각에 이어 떠오르는 달 달의 꿈이 잠긴 아, 항아리.
누가 항아리 속에 그 많은 말을 담아 놓았을까. 꿈속에서도 항아리의 낱말은 파란별이 되어 빛난다.
윤수천 시인 / 행복한 죽음
젊은 나이로 죽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다 푸른 줄기로 빛나는 나무처럼 싱싱한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
오래 산다는 것이 자첫 허물만을 남기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떠남은 행복이다
저 누추한 얼굴들을 보아라 추한 무덤들을 보아라 살았어도 산 게 아닌 가엾은 사람들을 보아라
아쉬워할 때 떠나는 것은 오히려 고맙다 그럴 수 없는 게 다만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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