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 시인 / 지붕 위에서
어머니가 유치(乳齒)를 지붕 위로 던지고부터 낯선 보병이 내 손을 지붕으로 이끌었다. 유년을 잃었고 이 층이었고 삼 층이었고 고원(高原)이었다. 누구도 나를 향해 총질하지 않았고 누구도 수류탄을 까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戰場)이었다. 나는 포병도 공병도 아닌 지붕을 기는 보병이었다. 사춘기가 지붕을 타고 왔듯 겨울과 가을도 지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만난 지붕은 북국의 설산처럼 가파르고 아찔했다. 두려웠지만 더러는 황홀하였다. 그러나 전장(戰場)에 속했으므로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폭설이 군단병력으로 몰려 왔고 자주 눈사태를 만났다. 첫 번째 여자였다. 누구도 내게 무전 치지 않았고 누구도 특공대를 파병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므로 추락하였고 양철 지붕 위였고 두 번째 여자였다. 전투는 끊이지 않았고 계절은 뒷걸음쳐 가을이었다. 별을 세는 일은 몹시 드물었고 고독해서 좋았고 전선은 밀릴 때까지 밀렸다. 모든 게 위태로웠다. 전투는 지루했고 패배해서 좋았다. 젖은 바람이 불규칙적으로 불었고 파편처럼 찬비가 뿌렸다. 아침이면 먼 곳의 전초기지로 이동해 전투를 벌였다. 어김없이 저녁은 왔고 나는 양철 지붕으로 회귀해야 했고 다시 또 전투를 벌였다. 누구도 나를 폭파하지 않았고 누구도 사랑을 타전하지 않았다. 눈 감으면 파노라마처럼 첫 번째 지붕이 펼쳐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나무지붕이 다가와 있었다. 삐걱삐걱 위험해 보였지만 얇은 햇살이 스미고 있었다. 종종 지붕을 옮겨 탔고 아늑했지만 나는 여전히 전장(戰場)의 안쪽에 속해 있었다. 누구도 총질하지 않았고 누구도 수류탄을 까지 않았고 지붕 아래는 타인의 구간이었다. 언제부턴가 지붕이 기울기 시작했고 그래도 나는 일관되게 지붕 위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랬다. 포탄 한 발 명중되지 않았지만 어느 날 지붕은 폭삭 내려앉았고 아버지 어머니는 지붕과 함께 전투를 끝냈다. 밤마다 지붕을 타던 고양이가 몰락한 지붕 곁에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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