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 시인 / 늦었지만 쥬 마뻴 꾸뻬 씨,
행복하니, 라고 묻지 않았소 생각해보니 뇌가 오렌지색으로 빛나던 때를 보았던 것도 같소만 꾸뻬 씨*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꽃이 피고 샘물이 솟는 것은 <늦었지만생일축하해> 쪽지를 어느 날 발견한 것처럼 느닷없을 것이오 말하자면 운명은 복면을 하고 우리 곁에 머무는 형상과 같은 것이겠소 불손한 것에게 멀미를 느끼는 일요일이오 그리고 둥근 식탁에서 메모했을 손끝을 짐작하오 그날은 변덕스런 날씨였나 보오 잉크가 마르기 전 번져버린 층층나무 밑으로 꽃잎이 뒹구오 층층나무에 마음이 있다는 발칙한 발상은 누가 한 거요 그런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은 깊은 그림자를 가져야 할 것이오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질서로 향하고 있소 그러니 꾸뻬 씨, 일요일마다 꿈꾸던 혁명이 집집이 무너지는 마을을 찾으시오 이윽고 그들의 환호를 마을 어귀에 장식하시오 그곳에는 내일이 매개하는 무엇이 층층 열릴 것이오 지겹겠지만 꾸뻬 씨, 손끝에서 번진 쪽지를 오후 세 시쯤 보내주시오 새로운 폐허에서 깨는 것은 어중간한 그 시각이 적당할 게요
*프랑수아 를로르 소설『꾸뻬 씨의 행복 여행』의 등장인물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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