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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수천 시인 / 우산 하나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 1.

윤수천 시인 / 우산 하나

 

 

비오는 날에는

사랑을 하기 좋다

우산 한 개만으로도

사랑의 집 한 채 지을 수 있으니까....

 

 


 

 

윤수천 시인 / 인생이란

 

 

남기려고 하지 말 것

 

인생은

남기려 한다고 해서

남겨지는 게 아니다

 

남기려고 하면 오히려

그 남기려는 것 때문에

일그러진 욕망이 된다

 

인생이란 그저

사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 아니다

 

 


 

 

윤수천 시인 / 전기밥솥

 

 

둘이 사는 집엔 전기밥솥이 딱이다.

밥솥에 쌀 넣고 물 붓고

딴일 좀 하다 보면

어느새 다 됐다고 신호를 보낸다.

 

참 고마운 밥솥

 

이젠 한 가족이 되었다.

요 예쁜 딸아.

 

 -2020년 2월 10일 (월) 중부일보

 

 


 

 

윤수천 시인 / 짧은 시간을 길게 만드는 그리움

 

 

내 마음속의 그리움을

살짝 꺼내서

길게 늘어뜨리면

어디까지 가 닿을까

은하수에라도 가 닿으면

작은 배를 띄우고

목청껏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 사람의 생애는

가슴 떨리는

그리움의 길이만큼

행복하다고 하는데

 

짧은 시간 속에서 만드는

우리의 그리움

그리움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애

 

내 마음속에 숨어있는

그리움의 길이는 도대체

어느 만큼일까

 

한 사람의 생애는

가슴 떨리는

그리움의 길이만큼

행복하다고 하는데..

 

 


 

 

윤수천 시인 / 파도는 왜 아름다운가

 

 

내가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다.

내 몸을 둘둘 말아 파도를 만들어

끝없이 끝없이 부서지는 일

곤두박질을 치며 부서지는 일

 

파도는 부서지고 싶다.

차라리 닳아지고 부서져 아름답고 싶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므로

 

 


 

 

윤수천 시인 / 할머니는 바늘구멍으로

 

 

할머니가 들여다보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잖는데

할머니 눈에는 다 보이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실끝을 곧게 세우고는

바늘에 소리를 다는

할머니 손

 

밤에 보는 할머니의 손은 희다.

낮보다도 밝다.

 

할머니가 듣고 있는

바늘구멍 저 너머의 세상 소문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잖는데

할머니 귀에는 다 들리나 보다.

 

 


 

 

윤수천 시인 / 항아리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항아리 속에서는

구름이 떠간다.

 

꽃구름

뭉게구름

소나기구름.

 

아무도 없는 데도

항아리 속에서는

무슨 소리가 난다.

 

꽃잎 눈뜨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때론 수수밭을 서성이는

그 달빛 소리.

 

누가 맨 처음

항아리 빚는 것을 알았을까.

 

별이 우쭐대는 밤이면

나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빨간 불더미에서

흙을 주무르시던

그 불빛 손.

 

할아버지 생각에 이어

떠오르는 달

달의 꿈이 잠긴

아, 항아리.

 

누가 항아리 속에

그 많은 말을 담아 놓았을까.

꿈속에서도

항아리의 낱말은

파란별이 되어 빛난다.

 

 


 

 

윤수천 시인 / 행복한 죽음

 

 

젊은 나이로 죽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다

푸른 줄기로 빛나는 나무처럼

싱싱한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

 

오래 산다는 것이

자첫 허물만을

남기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떠남은 행복이다

 

저 누추한 얼굴들을 보아라

추한 무덤들을 보아라

살았어도 산 게 아닌

가엾은 사람들을 보아라

 

아쉬워할 때 떠나는 것은

오히려 고맙다

그럴 수 없는 게

다만 아쉬울 뿐

 

 


 

 

윤수천 시인

1942년 충북 영동 출생. 경기도 안성에서 자람. 국학대학 2년 수료. 1974년 소년중앙문학상 동화 당선.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집 '아기넝쿨', '겨울 숲', 동화책 '꺼벙이 억수',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나쁜 엄머', 시집 '쓸쓸할수록 화려하게', '빈 주머니는 따뜻하다', 발간.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수상. 초등학교 4-1 국어활동 교과서에 동화 <할아버지와 보청기>수록. 현재 수원문학 고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