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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춘석 시인 / 식물의 위쪽 상부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4.

박춘석 시인 / 식물의 위쪽 상부

 

 

특별히 선약은 없습니다 가을은 가을답게 가득차서 우주의 크기를, 그 한계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가을은 가을답게 가지치기를 잘 하는 가위를 가졌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려던 커피는 공기 속에서 오늘은 꺼내지 마시고 커피라는 이름도 붙이지 마십시오 나의 오늘은 고이 잠드는 침대와 같은 곳에 있습니다 커피향기도 끓는 물도 발생되기 이전으로 두십시오 나는 여기 겨울 속에 씨앗으로 있습니다 당신이 주겠다는 커피를 마시러갈 몸이 없습니다 나의 식물은 겨울이 공기 속에 감금하여 잠재우는 중입니다 나의 사람은 겨울침대에 눕혀두고 봄을 기다립니다 내가 얼마나 자라지 못하는 식물인가는 가지런히 놓인 신발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발은 좋은 화분도 거름도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신발을 신지 못하여 아침에서 저녁까지도 못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없습니다 어제도 식물을 기다렸습니다 오늘도 식물을 기다립니다 식물이 자라오지 않는 동안 사라진 것에 대해 투명한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 겨울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가을은 잎만 떨어뜨리는 정교한 가위를 가졌습니다 저 나뭇가지는 우주의 크기보다 더 크려고 했나봅니다 정교하게 잘려나간 자리에 다시 가지가 자라오면 그때 팔랑팔랑 가겠습니다 그때 공기 속에서 커피라는 이름을 호명하며 꺼내주십시오 마침 나도 팔랑팔랑 도착하겠습니다

 

자유가 어떤 곳에 도착하는 식물이라면 미래가 식물의 위쪽 상부에 있다면 나의 식물은 아직 투명한 곳에서 자라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없는 나에게 ‘혹시 시간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크지 『그림나무 시』 2018년 겨울 발표

 

 


 

박춘석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2002년 《시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는 누구십니까?』(시안, 2012)와 『나는 광장으로 모였다』(현대시학, 201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