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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재연 시인 / 잠복기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4.

이재연 시인 / 잠복기

 

 

좋아졌다고 생각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좋아진 것을 의심하지 않아

길 건너 저쪽에서 이쪽으로 한 사람이 건너 왔습니다

멀리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먼 곳 또한

가까운 곳과 전혀 다른 곳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이고

흩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바다는 우리의 배후가 되었고

우리는 바다의 배후가 되었습니다

성급히 사라져버린 것은 그 아침의 햇살이었습니다.

좋았던 것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기어이 북엇국을 끓인 그 아침을 끝으로

잠깐 만났던 것은 잠깐의 일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남아있는 것을 위해

덧 붙여야 할 말이 있었지만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우리가 길을 건널 때

우리는 좋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밤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시퍼런 자존심만 살아있어 어디에서

다시 우리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주 잠깐 사이 우리는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긴 시간 다시 봄을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시기하여

그것을 기뻐할 이도 있겠지만

탄식의 입김으로 언 땅을 녹여 피워 놓을 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습니다

 

계간『문학의 오늘』 2018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전남 장흥에서 출생.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2년 제1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으로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2017)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