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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규정 시인 / 분홍역에서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4.

서규정 시인 / 분홍역에서

 

 

아득히 멀어져 가는 기적소리를

늦은 봄비로 그쳐 세우리

우산꽃, 분홍잎새 활짝 핀 유리창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몰려 나간 안색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싸움에서조차 한쪽 편을 들어주고

얻은 전흔의 전리품인가 반쪽 잘린 차표를 쥐고

몇 번이나 밖을 내다보다가 사라져 간다

그래 가장 낮은 목소리들이 사는 가슴 깊숙이

철렁 그물을 던져도 아무 것도 걸리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란 허탕칠 때 비로소 아름다웠다

남아 있는 것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돌아서는

봄날의 간이역

반쪽을 줍다가 나머지를 잃어버린 우리

흔들리며 떠나던 유리창에 우산꽃은 지고

우리들은 깊이 박힐 못 하나의 모습으로

언제까지 제 얼굴을 외우며 서 있어야 한다

 

-시집 〈황야의 정거장〉(1992) 중에서-

 

 


 

서규정 시인

1949년 전북 완주에서 출생. 김제고등학교.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겨울 수선화』 외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