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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시인 / 스완댄스
스완댄스를 본 적이 있나요 스완송을 들어본 일 없지만 그날 제가 본 것은 어린 벚나무의 독무, 스완댄스 였습니다. 푸른 이파리 드레스를 차려입고 19세기 크리놀린 드레스 앞자락을 들고 스텝을 밟는 순간이었습니다. 흔들리는 것이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누울 자리를 잡으려고 균형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벚나무 한 그루, 혼자였습니다. 그 나무는 왜 거기 있었을까요. 제 발로 거기 심어진 것은 아닐 텐데 서쪽이고 북쪽이었습니다. 동쪽이나 남쪽에 자리 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누군가 서쪽이며 북쪽을 사랑해서 거기 그 자리에 그 벚나무를 심었겠지요.
지난밤 폭풍이 몰아치고 아귀가 맞지 않는 창문이 밤새 덜컹여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버틸 만큼 버텼습니다. 서쪽에서는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없답니다.
한 사람의 그늘이 그의 시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죽어야 아름답습니다. 죽기 전에는 지옥이지만 내가 죽으면 천국입니다. 천국에서는 은방울꽃이 그늘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고 파랑새가 종종거리며 은방울꽃 종소리에 화답하며 꽃밭 주변을 서성이겠지요.
한 그루 벚나무가 시를 씁니다 하늘에 시를 쓰다 넘어지는 나무, 발꿈치를 들고 쓰다만 시
지난밤 폭풍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 네, 아니요 네, 네, 창문 밖 그림자 서쪽이 길어집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들 햇살을 받아 반짝입니다 금빛으로 변모합니다
퀵, 스텝 퀵퀵, 스텝, 스텝 마지막 인사는 댄스입니다
심각한 포즈는 노노 서쪽이 깊어집니다
결핍은 천장을 뚫는 힘입니다 검은 흙을 뚫고 올라오는 연두 이파리들 침묵으로 꽃대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봄비가 은방울꽃 연두 이파리 위에서 난타로 환영합니다 은방울꽃 이파리가 흔들리고 파란 앵무가 웃음을 터뜨립니다
먼지 냄새가 아득합니다 나의 소심은 당신의 잔인함을 무럭무럭 키워 줍니다
북쪽이며 서쪽에 서 있습니다 꽃 피는 계절이 다가와도 햇살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가느란 생각으로 고요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는 왜 어쩌다가 빛이 닿지 않는 곳만을 사모하는 것일까요 퇴근길 사람들 102동 앞을 지나갑니다 넘어진 벚나무 사이로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갑니다
상처도 결핍도 은방울꽃 맑은 소리에 스며들어 넘어진 벚나무 한 그루의 배경이 됩니다
저녁노을이 하루의 배경이듯이 북쪽이고 서쪽인 하늘, 내가 가고 은방울꽃이 피어납니다, 내가 가고 서쪽이 피어납니다.
계간 『시와 함께』2020년 가을호 발표
정혜영 시인 /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2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를 타고 소년은 지나가고 소녀는 앞치마를 벗어 머리 장식을 하고
소녀는 남아 있네 복도가 긴 아파트 막다른 907호
이건 아닌 것 같아 두 발이 엉킨 것 같아 소녀는 발레리나가 되는 꿈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면바지와 청바지의 무릎이 찢어져서 너덜너덜 완벽한 달력 그림처럼 우린 삼 년밖에 같이 못 살 거야
막다른 골목에서 너는 죽일 듯이 내 목을 누르고 내게는 아직도 목숨이 세 개 있고
그건 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 골목은 막다른 골목 담장 위엔 고양이 눈동자
기시감 따윈 무시해도 되는 줄 알았지
수만 년의 빙하와 크레바스가 여자와 남자를,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을 발굴하고
소년은 소녀를 영영 모르는 채 블랙홀을 하나씩 키우고 있지 여길 떠나면 달라질까 로마에서 보자 나를 보러 꼭 놀러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ET가 된 것 같아 베트남에서 자리 잡을지도 몰라
누가 누구에게 빛을 주고 그 빛은 어디서 생겨나는지 까마득하고 분명히 섬망의 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얀 말이 뛰어노는 안드로메다의 푸른 목장이 어디엔가 있는 것 같기만 하고
계간 『다층』2020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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