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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미화 시인 /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이 여백은 나의 입덧의 한때다
당신과 무더운 밤을 나서면
바랭이풀이 물들고 달개비꽃이 피는 언덕배기 청수박 한 통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투명해지도록 수박을 먹는다
그때 아이의 까만 눈이 생기고 둥근 입이 생겼지 침샘이 소르르 돋고 솜털이 올라왔지
바랭이풀이 우거지고 달개비꽃이 번지는
이 노래는 나의 입덧의 절정이다
나는 달을 게워내고 당신은 구름을 밀어내고
여름밤은 어디가 어딘지 모른 채 흘러가고
* 정선의 그림 서과투서(西瓜偸鼠)를 보고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었다』
석미화 시인 / 물도서관
-로니혼은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녹은 물을 스물네 개의 유리기둥에 담아 물도서관이라 이름지었다
그에 대해 나도 할 말이 생겼다 물을 흔드는 물소리 아득한 옛날로 흘렀다 내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 고향집 뒷산에는 이상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폭염이 시작되면 나를 데리고 영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차고 시린 물이 떨어지던 옆으로 띠풀자리를 만들었다 누워서 듣던 물방울 소리 저 투명한 속은 슬픔이 없는 곳이란다 메아리가 울렸다 스물네 개의 빙하를 돌아들었을까? 알 수 없는 물음이 일렁거렸다 물방울이 웅덩이로 떨어지는 동안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잤을까 얘야 이제 가자 동굴 속 얼음물을 유리병에 담아 오던 어스름 녘이었다 환생은 저 빛으로 올까 잠들어 본 일이 있었을까 물빛은 흔들리며 아득한 옛날로 흘렀다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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