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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석미화 시인 /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4.

석미화 시인 /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이 여백은

나의 입덧의 한때다

 

당신과 무더운 밤을 나서면

 

바랭이풀이 물들고

달개비꽃이 피는 언덕배기

청수박 한 통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투명해지도록 수박을 먹는다

 

그때 아이의 까만 눈이 생기고 둥근 입이 생겼지

침샘이 소르르 돋고 솜털이 올라왔지

 

바랭이풀이 우거지고 달개비꽃이 번지는

 

이 노래는

나의 입덧의 절정이다

 

나는 달을 게워내고

당신은 구름을 밀어내고

 

여름밤은 어디가 어딘지 모른 채 흘러가고

 

* 정선의 그림 서과투서(西瓜偸鼠)를 보고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었다』

 

 


 

 

석미화 시인 / 물도서관

 

 

-로니혼은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녹은 물을 스물네 개의 유리기둥에 담아 물도서관이라 이름지었다

 

   그에 대해 나도 할 말이 생겼다 물을 흔드는 물소리 아득한 옛날로 흘렀다 내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

   고향집 뒷산에는 이상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폭염이 시작되면 나를 데리고 영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차고 시린 물이 떨어지던 옆으로 띠풀자리를 만들었다 누워서 듣던 물방울 소리

   저 투명한 속은 슬픔이 없는 곳이란다

   메아리가 울렸다 스물네 개의 빙하를 돌아들었을까? 알 수 없는 물음이 일렁거렸다

   물방울이 웅덩이로 떨어지는 동안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잤을까

   얘야 이제 가자

  동굴 속 얼음물을 유리병에 담아 오던 어스름 녘이었다

  환생은 저 빛으로 올까 잠들어 본 일이 있었을까 물빛은 흔들리며 아득한 옛날로 흘렀다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었다』

 

 


 

석미화 시인

1969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2010년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4년《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2019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