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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성희 시인 / 환승역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4.

배성희 시인 / 환승역

 

 

가을비다 해 질 무렵

천 개의 눈을 감고 있는 유리창마다

촘촘하게 수두자국을 남긴다

보도블록으로 낙엽냄새가 스며든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

팔 없는 빈 소매 잠바주머니에 넣고

좌판에 쭈그려 앉은 사내

천 원짜리 나일론 스카프 젖을까

왼손으로만 투명비닐을 덮어준다

 

내가 걸친 옷은 젖지 않는다

 

중력에서 풀려난 몸

오늘 밤 使者의 손을 잡고

수증기처럼

사라질지 알 수 없는데

 

끝까지 가져가는 비밀이 있다

 

불린 쌀 한 줌 입에 머금은 채 쏘다닌

49일 마지막 날

없는 안경테를 만지며

공원묘지 행 버스를 기다린다

 

 


 

 

배성희 시인 / 팥빙수 먹기

 

 

세상의 모든 빗방울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독 오른 도마뱀 한 쌍

 

원목탁자의 흉터 닮은 전기 톱날 소리

얼음덩이 갈려나가는 소리

젖은 발가락을 오그린 채

팥빙수를 먹기 시작했어요

 

귀 없는 시체를 흔들어 깨워서라도

말하고 싶었어요

썩어가는 벽지나

벌레와의 동거에 대해서

 

젖은 발가락을 다 말리면

또 다른 도마뱀끼리 낄낄

 

찢긴 레일의 복판을 꿰매고 가는 지하철 소리

 

비 그치고 집으로 갔어요

벌레 먹은 방 갈아 마시러

 

 


 

 

배성희 시인 / 습지의 밤

 

 

짙은 안개를 둘러쓰고 툭

툭 부러진 꿈들이 습지로 기어든다

 

헐어버린 위벽처럼 갈라진 표면 틈새

바람과 별빛이 들고난 늪에는 마블링 흔적이

살아 뭉클하다

 

나는 두꺼운 가죽을 뜯어내고

우둘투둘한 살갗을 바닥에 문지른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혀를 구석구석 굴려

침을 가득 고이게 한다 천천히

나눠 삼키고 눈알을 뒤집어 감는다

지금은 아가리가 절반인 짐승이지만

이브였다 나는

미지근한 곤죽이 저 홀로 달아오르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빤다

 

가슴도 엉덩이도 없이 오그라든 팔다리

비틀고 질척인다 기묘한 수초들이

물버드나무 뿌리를 휘감을 때

늪의 숨결은 거칠어진다

 

화염도 빙하도 하나인 육체

진땅이 거듭 되살아나고

 

 


 

 

배성희 시인 / 휴지기

 

 

싸늘한 방에 누워 올려다보네 비스듬히

절개된 허공이 마음에 들어

 

창문에 검은 종이를 반 넘게 붙여야했지

산비탈 아파트 조명이

내 꿈을 간섭했거든

빛을 가리고 있는 종이 바깥으로 밤이 보이네

준비하고 있는 것은 가을 낮 짙푸른 색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지 어둠은

자신과 싸우면서 숨을 고르고 있어

 

기억해, 새로운 DNA가닥이 만들어지는 공백

세포가 분열되기 전 休止期라는 것을

이중나선이 갈라졌다가 빈칸을 채우듯이

세상모르는 애인과 만나 손깍지를 끼듯이 엎치락

뒤치락 어둠이 곰삭으면 최고의 파랑이 탄생하겠지

 

오래전이야, 포개진 가슴위로 스케이트 칼날이 수천 번 지나가고 투명한 얼음은 구정물이 되었지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어 4차선 횡단보도 건너편 자코메티가 서 있던 그 날 뒤돌아 얼른 골목길로 숨었지 독방에서 쓴 눈물을 삼켰지

 

혼자서 파랑을 만들어가는 밤하늘과

나는 서로의 꿈을 지켜주고

기다리기로 했어 푸르스름

새벽 창을 천천히 열어두었지

 

 


 

 

배성희 시인 / 와플 하우스

 

 

조용한 신발이 필요하다

바닥마다 엠보싱으로 만드는 하이힐 말고

소리 없이 드나들 때

불쑥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

노랗게 질리는 얼굴

 

거실 구석

바퀴벌레 기어가는 소리도 들린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코미디를 보고 웃는 일은 없다

각방에서 모니터를 마주하고

키득거린다

 

벤자민 화분이 죽었다

눈치 없이 무성해서 살충제를 뿌렸더니

 

광랜에너지로 충만한 보금자리

여자는 홈쇼핑 마감 때만 극치에 오른다

빨간 총잡이 그는 매일 밤

비키니 여전사의 엉덩이를 미행한다

 

 


 

배성희 시인

이화여대 생물과 졸업. 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서정시학, 2011)가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