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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시인 / 군고구마
아파트 앞 신호등 곁에서 앳된 청년이 군고구마 좌판을 벌였다
드럼통 주위엔 온통 나무 타는 연기로 가득하고 이리저리 돌려 눕히며 이쑤시개로 검은 연기자국이 얼룩덜룩한 고구마의 허리 조심스레 찔러보는 청년의 얼굴도 얼룩덜룩하다
청년 앞에 놓여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세상도 아마 저렇게 매캐한 연기 투성일 게다
앞과 뒤, 깊은 속까지 적당하게 익힌다는 것이 잘 익어 먹기 좋게 된 삶을 금방 눈으로 알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생으로 불 속에 던져졌던 나도 저랬다 밤낮으로 뒤척거리며 따끈하게 익어 접힌 봉지를 열 수 있기를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 달짝지근한 발길 건널목을 건너갈 수 있기를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뜨거운 통속에서 뒹굴었다 단 한 번의 흥정도 없이 구겨진 지전 같은 겨울 벚나무 아래 주춤거리는 내 몸에선 바삭거리는 소리만 떨어지고 허리를 굽힌 손톱달이 쿡, 쿡, 숯덩이가 된 나를 찔러보고 있다
권애숙 시인 / 봄이라는 개
그 개의 목줄은 한 평 반의 도전이다 주인이 던져주는 생선가시를 핥을 때 경계 밖의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 철걱철걱 층계 밑을 돌며 킁킁 지나가는 동족의 냄새에 침 묻은 가시 뱉기도 한다 개조심! 열린 집이 내 놓은 엄포 아래 빈 스텐 밥그릇 이빨자국이 나 있다 아이들 몇 소리소리 골목을 잡았다 펴고 개는 번쩍이는 목줄을 당겼다 놓는다 - 봄, 보오옴! 귀가한 주인이 목줄을 풀어주면 주둥이 질질 땅에 끌며 개는 골목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 한다 도전과 자유는 다만 한 평 반, 번쩍이는 목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권애숙 시인 / 누군가 오래 머물 때
길은 탱탱하게 꽃들을 당기는데 마음은 이미 여기서 떨어진다 산그늘 아래 수위가 낮아진 수원지, 쪼그려 앉아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수심이다
덜어낸다는 것은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 뒤척거리며 등이 배가 될 수 있다는 얘기 좁아진 물길을 건너뛰며 왜가리 한 마리 풍경을 흔든다
곁에 저 방랑을 붙들어 두려고 수원지는 돌아앉아 천천히 저를 퍼냈을까 그늘에서도 구불거리는 뒷덜미가 환하다
가는 발목까지 수위를 낮춰야 누군가를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인데 한 시절 내 오만한 물살을 치고 상류로 날아간 너, 날아가는 것은 왜 그림자조차 뒤돌아보지 않을까
너무 깊고 푸르게 넘실거리는 것은 위험하다
권애숙 시인 / 너라는 기차를 탔다
마침내 아픈 발바닥을 팔아 역방향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허술한 풍경을 바꾸며 너라는 기차가 달려왔다 낮달의 눈매가 맑았다
허름한 강둑에서 갈대들이 흘러내리는 배낭을 털어대면 속 깊은 새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칸칸이 덜컹거리는 나를 실은 채 너는 가끔 채머리를 흔들었다 어디 아픈 거니? 우군이라는 이름을 의자에 새기는 동안 나는 멀미를 했다
날아가는 바닥을 따라 어떤 도시에선 지붕이 달렸다 구도를 바꾸며 흔들리는 풍경은 늘 건너편이다 건너편이 쏟아내는 기적,
멈출 줄 모르는 너와 내 곁으로 낯선 기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눈발이 묻은 유리창에 언뜻, 나의, 너의, 퍼즐이 반짝거렸다
권애숙 시인 / 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이쪽은 없고 저쪽만 있다 아니 때때로 저쪽도 없고 이쪽도 없다
내가 건너편에서 자기야, 손을 흔들면 그들은 더 먼 곳을 향해 출렁거린다
물결이 물결을 꺾는 세상의 기슭에서 얼룩이 얼룩을 지우는 상강 언저리
-오늘, 서리가 온대 -뭐시라꼬? 소리를 하라꼬?
대답은 엉뚱하게 다가오는 변방
바래지는 귀를 말고 추워지는 눈과 입을 덮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서리가 희미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안쪽과 바깥쪽이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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