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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고음 시인 / 꽃잎 보고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7.

나고음 시인 / 꽃잎 보고서

 

 

꽃을 줍는다

꽃 주운 자리마다 주름이 패이더니 길이 되었다

 

내가 꽃이었을 때부터

꽃자리마다 작은 길이 있었다

눈물길이 있었다

 

나의 몸 어딘가를 누르면

툭,

넘쳐흐를 것만 같은

눈물 한 사발

 

흙을 빚어

벌건 불에 구워 눈물사발을 만들었다.

눈물은 이내 사발을 넘쳐 강이 되어

밤이면 조용히 귀 열고 흐르는 강물 소리 듣는다

 

내게서 떨어져나간 꽃들이

그대로 강물에 떠 있는

오늘은

꽃들의 말을 듣는 밤이다

 

 


 

 

나고음 시인 / 별무늬 사발

 

 

까맣게 옻칠한 작은 사발에서

별빛 쏟아진다

총총히 떠 있는 하늘 숨구멍에서

겨울 입김 하얗게 쏟아진다

 

작은 가슴에

저 별빛

저 입김

어찌 다 담았을까

 

 


 

 

나고음 시인 / 다섯 개의 눈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본다

 

첫 장을 열자 27세 젊은 샤갈의 자화상이 나온다

깊고 그윽한 눈매와 우뚝 솟은 코가 그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른 페이지엔 넓은 어항에 5개의 눈이 둥둥 떠 있다

그림을 잘 관찰한 후 이 중에서 샤갈의 눈을 낚시로 건지는 거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주는 예술가와의 만남이 흥미롭다

 

그림을 찬찬히 살피는 나에게

어항 속의 물고기가 빤히 보고 말한다

무얼 망설이세요?

 

물의 결 속에 자신을 감추고 옅은 그늘에서 기웃거리는 저 눈도

싱싱하고 푸르렀던 기억에 기대어 내밀한 외로움을 더 외롭게 하는 저 눈도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그늘을 타고 앉아 나르시시즘에 빠진 환상적인 저 눈도

조용한 파도가 흘러나와 주변을 촉촉이 적시는 그윽한 저 눈도

 

다 내 눈이어서

 

 


 

 

나고음 시인 / 디오게네스의 햇볕

 

 

햇볕을 찍어서 종이 위에 그리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하얀 종이 위에서 차례로 피어오른다

사는 사람 하나 없지만 할아버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 숙여 열심히 부채 위에 햇볕을 찍어 점점이 그리고 있다.

 

따끈한 붕어빵, 타닥타닥 소리 내며 익는 군밤, 털목도리, 양말 가게 사이에 생뚱맞은 부채 가게. 뭉쳐진 찬바람을 한 덩이씩 쏟아 붓는 지하도 입구 줄지은 노점가게 사이

 

겨울 한복판에 불러들인 한 줌 햇볕에 몸을 녹이며

접이부채 안에서

그림과 대화하고 있는 할아버지

 

안국동 디오게네스 할아버지 부채를 사서 오는 날

마음 속 저 밑에서

따뜻한 햇볕이 몽글몽글 솟아나고 있었다

 

 


 

 

나고음 시인 / 흑임자 밥

 

 

빵이 되고 비가 되고

흰 새가 되는 꿈을 꾸며 흘러간다

 

물을 붓자마자 흑임자 알갱이들 벌떡 일어나

하얀 쌀뜨물 위를

개구리처럼 팔딱 팔딱 뛰며 키를 세운다

물에 젖기를 기다려 보지만

순한 밥이 되기를 거부한 채

둥 둥 흘러간다

 

파랗게 굴리는 눈 속에 작은 호랑이가 숨어 있었던 걸까

말아 올린 빨간 혓바닥을 힐끔 내밀던 야성을 감추며

먼 길을 떠내려간다

 

흑임자가 황산화물질에 아미노산에 뇌기능에 탈모까지 잡아주는

블랙 푸드의 총아임을 알기까지

더 많은 날을 흘러가야 한다

 

나의 흑임자.

 

 


 

나고음 시인

경남 마산에서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졸업. 2002 《미네르바》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불꽃가마』『저, 끌림』과  미술저서 『유아미술교육학』, 『마음을 여는 미술활동』공저와 에세이 『26&62』, 동시 『사이사이 동시집』 편저가 있음. 2015년 서울시문학상 수상. 숲속의 시인상, 제11회 바움작품상, 한국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