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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인 / 나무가 무성하고 마음이 무성하고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고
가로수는 병충해에 강한 것이 선택되고 여름에는 푸르고, 겨울에는 빛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가로수의 간격은 8m가 원칙이나 도심지는 6m로 한다 같은 노선에는 같은 가로수를 심어야 한다
─이게 가로수의 규칙이래 ─그러면 저건 6m 간격이겠네
이제 우리가 마지막 사람이었다 불 꺼진 건물들 사이, 우리는 새벽의 벚나무 아래를 걷고 있었고, 어스름 속에서 벚꽃잎은 창백한 푸른 빛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가로수가 벚나무래 ─벚나무도 가로수야?
너는 자꾸 어디서 들은 말을 주워섬겼다 밖으로 나가면 죽을 수도 있대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는 5층 높이래 휘발유 냄새를 좋아하면 기생충이 몸에 있는 거래
그런 말들이 우리를 지켜주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 말들을 따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아침이 오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 고요했고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내가 마지막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꾸면 끝없이 가로수가 늘어선 길 위에 서 있다 나무들은 어김없이 6m의 간격을 유지한 채로 영원히 거기에 있다
황인찬 시인 / 구관조 씻기기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황인찬 시집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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