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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숙 시인 / 당신이 온다
낡은 풍경 속으로 바람이 분다 양장본 책들 가지런하게 쏟아지고 못처럼 날카로운 비난들이 날아와 박힌다 기억을 찢고 문은 덜컹거리고 지붕은 날아간다 뒤흔드는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 가까워지고 있다 내게 수호신이 있었던가, 머리끄덩이 잡혀 내팽개쳐지고 고름은 터지고야 말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온다 태풍 뱃가죽을 갈라 호랑이처럼 올 것이다 쪼글쪼글해진 털이 고양이 같을지라도 꽉 문 어금니에서 웃음이 흐를 것이다
책을 정리하는 내내 전나무는 젖어있고 별은 침상에 들었으나 일기 속 문장들이 말똥말똥 깨나고 있다
기명숙 시인 / 회상
화물 기차만 보면 절로 시커먼 콧물이 흘렀다 길길이 날뛰는 경적소리가 무서워 몸통이 빨개지도록 숨을 참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영식이 몸, 파편들이 침목에 달라붙고 갈가리 찢긴 살점을 쓸어 담으며 울부짖다 영식이 엄마는 미쳐버렸다 죽음 따위 아랑곳 않는 피에 길든 짐승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진저리치며 오줌을 지렸다
기억의 촉감은 유난해서 오래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차단기가 내려가고 아이들은 도로 환해졌지만 건널목 구멍가게 유리창은 사계절 어두운 표정이었다
나는 선로 위에 없애고 싶은 것을 올려놓고 그것들이 육중한 몸에 짓이겨지는 것을 바라본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데모꾼이라는 큰오빠가 곤봉에 머리가 깨진 채 대문 밖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선로 위에서 엄마의 구겨진 얼굴과 뭉뚱그려져 표정 없는 아버지의 얼굴이 납작납작 검은 쇳내를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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