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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복희 시인 / 버려진 시계는 방향이 없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8.

도복희 시인 / 버려진 시계는 방향이 없다

 

 

나는 늘 한결 같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

너에게로 가는 감정의 속도

일요일 오후의 표정조차

 

한 방향 밖에 없는 기차처럼

밤을 알리고  낮으로 데려가

늘 같은 레일 위를 달린다

 

역풍으로 방향이  휘어진다면

네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 볼 수 있을까

오지 않는 연락에 마음을 베이면서

나는 가던 곳 그대로 오후 2시가 되고

새벽 3시로 살아간다

 

혼자 눈 뜬  동네의 여섯번째 골목처럼

네가 사라지고 없는 이곳에서

마음을 닫아 둔 그날

 

눈발 이었는지

벚꽃 분분한 계절이었는지

기억을 버리기로 했다

 

동 타오는 창틀에 기대 싸늘하게 식어가던

몸은 무덤처럼 고요 하구나

오직 너에게로만 향하던 시침을 꺾고서야

생의 마지막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구나

 

 


 

 

도복희 시인 / 드라이플라워

 

 

내걸어 두었던 귀를 버렸어

비내리는 새벽을 열고

고막으로 찬비가 흘러넘치는 동안

서로를 듣지 않아서

우리는 눈 멀어가지

 

소심함으로 남은 각자의 방에선

봄을 말하지 않는단다

노랑나비 날개도 그리지 않아

입술에 머물다 날아간 휘파람처럼

한없이 얇아지지

 

끝내는 방법을 몰라서

사라지지 못했어

흔적을 바라볼 때마다

쳇기가 있지

손발이 차가워지지, 결국

서로의 곁을 서성거리는 귀신이 되지

 

비내리는 새벽창을 부수고

함부로 버려질테다

꽃의 형식이 아니었던

그때로 돌아가 나는, 다시

따듯해지는 땅냄새가 될거다

해를 품은 동토가

스멀스멀 녹고 있는

이른 봄날의 땅기운으로 돌아가고 말테다

 

 


 

 

도복희 시인 / 복면가왕

 

 

계급장 떼고 놀자

이름을 지우고 클레오파트라를 뒤집어 쓰고

이미 죽은 자들에 빙의 되어

나는 나를 잊을래

고음부의 절정이 터져 나와

너의 심장에 박힐래

눈가 얇은 떨림은

천상의 소리를 엿들었기 때문이지

정체 없던 수 많은 나를

발견할 때마다

흔들리는 동공

나라는 이름을 가리면

수 십개 꼬리가 갈라지지

황금빛 여우털이 눈부셔

알 수  없는 음역대로 토해내는

천상의 비밀들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가창력을

한여름 폭우처럼 쏟아내

너를 적실게

어느 지점의 감정에서 서로를 혼동하자

한 몸으로 뒹굴었던 어느 일요일처럼

나와 너를 잊어버리자

내일은 어떤 가면을 쓰고 놀까

 

2011년 《문학사상》신인문학상 당선작

 

 


 

 

도복희 시인 / 그녀의 사막

 

 

   여자의 몸에 더듬이가 자라기 시작했다 밤이 익어갈수록 손톱을 물어뜯는 횟수가 빨라졌다 그가 벗어놓고 간 와이셔츠와 빠진 몇 가닥 머리카락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낯선 냄새가 여자의 몸에 붉은 발진을 일으켰고 시간이 지나면서 냄새의 농도는 차츰 진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그 남자만 바라보고 왔기에 손동작 하나하나 읽히지 않는 것이 없는 여자에게 냄새의 징후는 불길했다 그것은 편서풍이 불 때 느껴지는 묘한 기분으로 가만있어도 멀미를 일으켰다 여자의 밤이 길어지고 발진의 부작용으로 온몸을 벅벅 긁어댈수록 길게 뻗어가는 더듬이는, 닫힌 현관문을 빠져나가 그가 품고 있는 흔적을 찾아다녔다 몸 한쪽에서 길어진 더듬이가 낯익은 냄새를 찾아 나선 동안 그녀의 발이 검은 집을 기웃거렸다 키우던 난화분들이 배배 말라가며 뱉어내는 신음이 베란다 가득 쌓여가는 집, 생장점을 저당 잡힌 여자가 더듬이로 버티는 집에서 밤마다 목쉰 소리가 웅얼웅얼 창틀을 새나갔다 악어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등에 악어 한 마리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다 끝도 없이 중얼거리는 입 바삭하게 말라가는 말들이 악어의 목구멍 속으로 연신 뛰어 들어가는 저녁, 그녀의 사막에는 돌개바람 뿌리가 쭉쭉 뻗어가고 있었다

 

 


 

도복희 시인

1966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계간 《시와정신》신인상으로 등단. 2018년 시집 <그녀의 사막> <바퀴는 달의 외곽으로 굴렀다>. 2010년 천강문학상 수상. 2011년 문학사상 신인상. 동양바이오뉴스 취재부장. 옥천향수신문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