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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시인 / 소요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박소란 시인 / 심야 식당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박소란 시인 / 고장 난 저녁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끓지 않는다 고장이다 이것 좀 먹어봐요 옆집에서 삶은 감자를 한 바구니 내민다 지나치게 감사한다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린다 어디가 고장인 건지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 멀거니 앉아 감자를 먹는다 설익어 설컹거리는 감자를 맛있게 먹는다 먹고 밤새 잔병이나 앓을 것 빈 바구니에 사과 몇 알을 가져다 담는다 군데군데 멍이 든 사과를 아무도 먹지 않겠지 다행이다, 빈 바구니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목이 메어 캑캑거리며 물을 마신다 끓지 않는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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