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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란 시인 / 소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9.

박소란 시인 / 소요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박소란 시인 / 심야 식당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박소란 시인 / 고장 난 저녁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끓지 않는다

고장이다

이것 좀 먹어봐요

옆집에서 삶은 감자를 한 바구니 내민다

지나치게 감사한다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린다

어디가 고장인 건지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

멀거니 앉아 감자를 먹는다

설익어 설컹거리는 감자를

맛있게 먹는다

먹고 밤새 잔병이나 앓을 것

빈 바구니에 사과 몇 알을 가져다 담는다

군데군데 멍이 든 사과를

아무도 먹지 않겠지

다행이다, 빈 바구니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목이 메어

캑캑거리며 물을 마신다 끓지 않는 물을

 

 


 

박소란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이 있음. 2015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