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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백겸 시인 / 구족(具足)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9.

김백겸 시인 / 구족(具足)

 

 

  연인이여, 당신 앞에 나타난 천지일월과 초목금수와 21세기 도시문명이 현실現實이라 생각하십니까. 현실이란 당신의 감각이 만진 세계 운동을 자아가 학습한 대로 그리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보는 창백한 그림자이며 ‘부르카’의 눈구멍으로 내다 본 만화경입니다. 당신은 현실이 달팽이껍질처럼 견고한 갑옷으로 당신의 몸을 감싼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희로애락의 이슬을 먹고 생노병사의 시간을 기어갑니다.

 

  연인이여, 당신이 그린 현실은 창백한 거울입니다. 실재實在의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마음’이 타오르는 빛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는 이 ‘물건’이 삼라만상에 구족(具足)해 있습니다. 한 알의 모래알도 우리 태양보다 천배나 큰 안드로메다 태양도 이 신비한 ‘물건’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의 부족한 이름으로 ‘무無’이며 ‘공空’이며 ‘일자一者’이며 ‘신神’으로 이름 붙였으나 모두 문화의 색안경으로 본 기호일 뿐 이름에 갇힐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연인이여, 그러므로 당신 안으로 침잠해서 육체의 감각과 마야의 환영을 지우십시오. 물질과 욕망의 생각들에서 벗어나십시요. 당신 안에서 신성한 불길로 타오르는 ‘한마음’을 보고 ‘시간과 공간과 행위와 양과 질’의 창백한 그림을 불태우십시오. 빛이 검은 태양과 하나임을 자각하고 ‘모든 높음보다 더 높아지고 모든 깊음 보다 더 낮아지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세계의 참 현실을 보고 태양이 비치는 아침의 장미꽃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타오를 것입니다.

 

*‘헤르메스’ 문서, 금강계 ‘밀교경전’을 참고

 

 


 

 

김백겸 시인 / 노아기

 

 

  요한복음 12장 3절은 말한다. 나사로 집에서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香油)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香油) 냄새가 가득하더라.’라고 기록했다. 예수와 제자들은 복음포교에 맨발로 다녀 발바닥이 마르고 표피가 상했으리라. 제자들은 비싼 향유(香油)의 낭비를 비난했으나 예수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무소유였던 예수의 생애에 최고의 사치였다.

 

  나는 들판에 보라색으로 핀 향유(香?)를 본다. ‘노아기’라고도 부르는 이 풀은 산야에 널리 자라며 자주색 들꽃을 피운다. 어둠에서 햇빛에 드러난 모습을 보면 야생처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예수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백합꽃 하나만 같지 못하느니라,’의 순간처럼 ‘노아기’는 자연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내 목숨이 향유(享有)하고 있는 향유(香?)는 예수의 발에 부운 향유(香油)임을 내 직관이 알아차린다.

 

  ‘향유’의 기표를 가지고 바이블과 본초학과 함께 내가 마음에 그린 관념의 그림은 ‘달리’의 그림처럼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린 낯선 이미지들이었다. ‘노아기’가 향유(香油)가 되는 세계가 관념과 관념을 거미줄처럼 엮어 추상과 패턴의 직물을 짜는 시의 세계이다. 시 나무가 세계목(世界木)처럼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나는 나무아래 벤치에 누운 시인. 하늘의 별처럼 핀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시 한 편이 태어난다.

 

 


 

김백겸(金伯謙) 시인

1953년 대전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데뷔했다. 대학에서 학생기자 활동을 하면서부터 문필활동도 시작. 학보사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1970년 초반 군사 정권에 대한 유신반대 데모에 휩쓸리는 등 불안정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나 세상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을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시집으로『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북소리』,『비밀정원』이 있고 시론집으로는 『시적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기호의 고고학』 등이 있다. 2005년 시집 『비밀방』이 문예진흥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고 그 밖에 〈대전시인협회상〉, 〈제1회 충남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현재 웹진 《시인광장》과 《시와표현》의 주간을 맡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근무. 대전시인협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