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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인 / 하모니카 부는 참새
무더운 여름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한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들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본다 수학선생도 사회선생도 국사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함기석 시인 / 당신을 위한 수탉의 모닝콜
갑자기 형사가 찾아오면 갑자기 나는 혐의자가 되고 용의자가 된다 갑자기 킁킁거리며 개가 다가오면 갑자기 나는 냄새나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갑자기 탄환이 날아오면 갑자기 목표물이 된다 곤충채집자가 나를 채집하면 난 이상한 곤충이 되고 벌레연구가가 나를 연구하면 난 이상한 벌레가 된다
내가 수염을 기르면 초승달이 수염을 기른다 내가 나팔을 불면 당나귀가 나팔을 분다 내가 수영을 하면 비행기가 수영을 한다 내가 속옷을 벗으면 가을 숲이 속옷을 벗고 내가 섹스를 하면 호텔이 수평선과 토마토 섹스를 한다 내가 세수를 하면 구름은 랄랄랄 면도를 하고 내가 외투를 걸치면 고양이는 호호호 화장을 한다 내가 외출을 하면 나무들은 하하하 담배를 피며 지나가고 가로등은 내 머리에 노란 우유를 쏟는다
내가 창공의 무지개를 둘둘 말아 허리에 두르고 눈썹 붙은 얌체 고양이 지지처럼 벤치에 앉아 시계를 보고 또 보며 시계 속으로 보이는 백만 년의 눈보라 백만 년의 바람소리 백만 년의 하늘을 보며 당신을 기다릴 때 갑자기 골목에서 방글방글 나타난다 갑자기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나타난 죽음이 퍽! 나의 생을 핸드백처럼 낚아채 빙글빙글 달아난다
그리하여 내가 죽으면 노랑머리 콩나물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붕어빵유령이 죽는다 내가 죽으면 고등어유령이 죽는다 어린 달걀들은 하늘을 맴돌고 당신을 위해 아침마다 모닝콜을 불러주던 나의 노래는 차디찬 물 속을 맴돌고 나의 피 나의 눈물 나의 숨결은 허공을 맴돈다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나무가 죽고 새가 죽고 도시가 죽고 문명이 죽고 천둥과 함께 백만 년이 흐르고 번개와 함께 다시 백만 년이 흘러도 빙글빙글 지구는 계속 돌고 뱅글뱅글 슬픔도 고독도 우리들 눈깔처럼 계속 돌고 뺑글뺑글 존재도 농담도 우리들 불알처럼 계속 돌고 돌다가 돌다가 완전히 돌 때까지 우주는 랄랄랄 계속 돌고 시간도 히히히 계속 돌고 죽음도 헤헤헤 계속 돌고 말들도 깔깔깔 계속 돌고
함기석 시인 / 착란의 돌, 詩
빌딩숲에 절이 있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새소리가 흘러 나왔다 달콤했다 활짝 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알몸의 여자가 목욕하고 있었다 황홀했다 정원으로 들어갔다 아카시아 꽃향기로 여자의 머릴 감겨 주었다 햇빛으로 상처 난 가슴과 허리를 씻어 주었다 여자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내 손을 끌고 신선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린 불륜의 사랑을 나누었다 알몸으로 뒹굴며 꿈같은 몇 분을 보냈다 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았다 10여 년이 지나 있었다 황급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사원은 거대한 새장으로 변해 있었다 어린 해바라기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 넌 무당벌레 넌 칠면조 넌 뚜껑 없는 주전자 이 곳은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는 유형지야 이 바보야! 난 날개를 푸득이며 새장 밖으로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밖으로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안으로 안으로 갇혔다 나는 지쳐 갔다 새장 속에서 내 청춘은 길을 잃고 말라 갔다 참담했다 오랫동안 외로웠다 오랫동안 방황했다 나도 나의 삶도 안으로 안으로 썩어 들어갔다 많은 밤을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대웅전에 불을 질렀다 나는 해바라기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염소가 다가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가슴에 고인 썩은 바다를 혓바닥으로 핥아먹으며 금붕어처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나는 활짝 핀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로 간다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 무서운 새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길을 찾는다 없는 길을 찾으며 나는 움직인다 내 주검이 누울 암흑의 그 자리를 맨손으로 파들어 가며 나는 쓰고 쓰고 또 쓴다 이 외롭고 잔인한 말의 사원에 갇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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