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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장석 시인 / 개정판 강풀 만화거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9.

전장석 시인 / 개정판 강풀 만화거리

 

 

어둠의 갈피가 느슨해진 만화거리 골목

접어놓은 페이지에서 등장인물 몇이 튀어나와

치킨집과 주꾸미집을 기웃거린다

말풍선을 벽에 붙여놓은 해설사들은 돌아가고

폐지 줍는 노인만 속편까지 남아

 

신문 배달하던 강풀 씨는 이곳에 살지 않는다

한때 옆구리에 끼고 달리던 희망은 부풀대로 부풀어서

날아간 홀씨처럼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채색화로 스미던 그녀와의 첫사랑은

날염의 붓끝 풍경 바깥으로 점점 희미해져

옥상의 빨래집게만 삭은 이빨 몇 개로

기억의 낱장을 간당간당 물고 있다

 

세상을 각색하며 떠돌던 옆집 아저씨가

어느 날 노을이 되어 돌아와

폐타이어처럼 눌러앉은 강풀 만화거리에

화살표 방향으로 굴러가던 것이

그가 꿈꾸던 낡은 희망의 바퀴자국이었음을

 

붕어빵처럼 구워지는 시간

등장인물들이 나무의자에 앉아

늙은 해설사인 바람의 등을 긁어주고 있다

 

시집『서울, 딜쿠샤』(상상인, 2021) 중에서

 

 


 

 

전장석 시인 / 광희문에서 출발한 순성(巡城) 놀이

 

 

길을 담보로 했던 일인데 길을 믿지 말라니

안내표지판이 경고문처럼 읽힌다

 

도심 한가운데서 길을 잃는 게 잘못은 아니다

 

성곽 밑을 자세히 보니 집 나간 돌들 여럿

돌아올 수 없는 이유가 세월의 하중 때문일까

나는 저곳에 붙어 있을까 아니면

본의 아니게 어느 집의 대들보가 되어 있을까

 

걷다 보니 정말 성곽이 안 보인다

누가 길을 잃은 것일까

성곽이 따라오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마음속으로 돌을 쌓고 이어본다

 

실선과 점선의 암묵적 대화

막힘과 드러남, 어둠과 밝음이 반복되면서

성곽은 제 길을 뚝심 있게 가고 있었던 것

 

뫼비우스 띠처럼 암문을 통과하니

성곽의 안과 밖이 술렁거리고

바람이 들숨 날숨을 반복하는데

 

이제부터 성곽을 오르는 일이란

궤도를 벗어난 우주선이 발사체를 버린 것처럼

몇 백 년 전의 숨결을 더듬어

묵묵히 나를 찾아가는 길

 

관성에 의해 성곽은 크게 원을 그려 갈 테지만

나는 직사각형이나 마름모꼴로 도성을 쌓고

지금처럼 세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미세한 떨림과 균열이 지속되어도

성곽이 쉬이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오늘의 순성 놀이가 끝나갈 쯤인가

반얀트리 호텔 부근에서 크게 건너뛴 성곽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기로 한다

 

성곽의 날개가 배낭 속에서 푸드덕거리는지

내 발걸음도 마냥 날아갈 것만 같다

 

시집『서울, 딜쿠샤』(상상인, 2021) 중에서

 

 


 

전장석 시인

2011년 《시에》로 등단. 시집으로『서울, 딜쿠샤』(상상인, 2021)이 있음. 2019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현재 한국경제신문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