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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영처 시인 / 도시의 규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9.

서영처 시인 / 도시의 규격

 

 

한집 건너 한집이 치킨점이다 한집 건너 한집이 커피점이다 두 집 건너 한집이 편의점이다 두 집 건너 한집이 김밥집이다 거리마다 전봇대 간격이 일정하다 시내버스 발차 간격이 일정하다 아파트단지 동과 동 사이 햇빛과 그림자 간격이 일정하다 담보대출 상환날짜가 일정하다 가로수들 잠들지 않는 봉분을 하나씩 이고 발목 묶인 가로등의 간격이 일정하다 그렁거리는 가로등의 눈망울 주말에도 영세한 작업장엔 파우스트를 그리워하며 실을 잣는 여공들

 

개업하는 점집 옆의 타투 가게 성인용품점 성업 중인 비밀도박장 옆의 가발전문점 파출소 폐업하는 24시 마사지 숍 아래 24시 국밥집 차양이 눈꺼풀처럼 무겁다 보도블록 위 껌 자국이 총총하다 블록 틈마다 꽁초가 촘촘하다 칸칸마다 청구서처럼 입주한 사람들 규격 속에 들어가면 안심이야 도시는 가로수를 세로로 심는다 고아나 다름없는 가로등을 모퉁이에 세운다 공단 위로 매연을 마시고 양순해진 구름이 떠다닌다

 

내 잠과 네 잠 사이를 회유하는 귀신고래 등 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은 꿈들 내 불안과 네 불운을 가로지르며 부침하는 섬들

 

계간 『창작과 비평』 2020년 봄호 발표

 

 


 

 

서영처 시인 / 장미의 세계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장미

울 때마다 송이송이 향기를 뿜어내는 장미

갓 태어난 장미에게 우유를 먹이는 동안

허벅지를 찍고 등으로 기어올라 잠 속을 기웃거리는 장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장미는 혀를 내밀어 내 눈물을 핥았다

가시 돋힌 팔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

골똘한 생각에 잠긴 골목을 지나 다시 생의 여름이 온다고

자꾸만 옆구리로 터져나오는 꽃들

야옹, 울 때마다 장미가 피어난다

생선을 발라먹고 가시를 토해내는 장미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는 장미

 

끝없는 갈림길이 있는 정원에서

계속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황량한 세계에 닿았다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나 가시 돋친 말을 뱉어내는 장미

입안에서 벌떼가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눈시울 위로 타오르는 장미

그 많은 눈시울 아래로 잠드는 무덤

기억의 지층 아래 묻힌 쓰레기를 파내 장미를 접는다

악취를 풍기는 장미

담벼락마다 장미가 피어오른다

돌연 줄을 풀고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해마다 넌출넌출 새끼들을 물고 오는 장미, 망각의 장미

 

월간 『현대시』 2020년 8월호 발표

 

 


 

서영처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학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2003년 계간 《문학 . 판》에 〈돌멩이에 날개가 달려있다〉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피아노 악어』(열림원, 2006), 『말뚝에 묶인 피아노』(문학과지성사, 2015)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예배당 순례』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계명대학교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