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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시인 / 수치(羞恥)
그것은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어버린다
예고 없이 불쑥 솟아나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달라붙어 수시로 나를 곁눈질한다
내가 나에게서 발견한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게 한
전생과 내생을 돌고 돌아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
나날이 어두워지는 내일처럼
약 먹을 때도 왼손으로 밥 먹을 때도 정리되지 않는 시구(詩句) 속을 헤맬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그 깊고 검은 빛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어
수치(羞恥)는 이제 나의 힘 그것마저 사랑해야겠어
배영옥 시인 / 훗날의 시집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 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향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월간 《시인동네》 2018년 9월호
배영옥 시인 / 모란
모란은 누구의 상실이기에 저리 붉은가
모란의 세계에 든 사람 누구도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우울한 얼굴과 슬픈 눈매
모란에 가면 모란은 없고
모란모란 만개한 눈동자들이 피워올리는 뜨거운 눈물만 있다
소리는 없고 눈매만 깊은
저 충혈된 헛꽃들!
배영옥 유고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2019
배영옥 시인 / 주름
주름들은 한 몸에 모여 산다 한번 자리 잡은 주름들은 잘 떠나지 않는다
내 몸도 수많은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몸 안에서 몸 바깥으로 울음을 밀어내고 밀어내다 멈춘 그 자리 바로 주름의 자리
중심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를 밀어내는 것 자신을 비워가는 것
아직도 비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듯 안간힘을 다해 주름을 넓혀가는 몸
지금은, 다만, 극단으로 깊은 주름과 골 사이 온몸이 헐거워지고 있는
『뭇별이 총총』, 배영옥, 실천문학사, 2011년, 6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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