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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인 / 혈(穴)을 짚다
아프다, 까마득하게 먼 기억이 강처럼 흐르는 곳 어딘가를 누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벌판 한복판 말안장에 얹혀진 돌덩이 하나 늘어진 신경 끝으로 죽은 장미의 검붉은 체액이 길을 내고 있다
전생의 마지막 귀가다 푸른 늑대의 유령이 달 없는 밤에만 나타나 여자의 붉은 살을 뜯는다는 계곡을 지나며 살아 숨쉰다는 안도에 호흡이 불규칙해지면, 별은 무리지어 이마에 박히고 접신하는 주술사처럼 동물의 이빨을 목에 건 모래바람이 삽시간에 눈과 귀와 입을 막는다
아프다, 관자놀이 가까이 머물며 비속한 쾌감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강 언덕에 화살을 날리는 전생에 관해 유감스럽다거나 '제발'이라는 단순함 외에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것은 펄떡이던 강물이 메마르며 뜨거운 공기가 헉!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다, 아프다 네가 짚고 간 길을 따라 아무리 짚어도 계속 허청대는 지상에서의 삶.
고경숙 시인 / 곁
나의 곁에 머물다 간 수없이 많은 사물들을 호명해본다
유년의 저녁 나를 찾아 나선 어머니의 노을빛 음성과 서늘한 바람 말없이 어느 가을, 함께 하늘을 바라봐주던 바닷가의 일몰 꼬박 캄캄한 밤을 나와 지새운 고독까지
시간이 메우는 그 저녁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마주하진 못한 서러운 잉여들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곁이 된다는 것은 환희의 반려이지만
누군가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슬픔이 내재된 철든 몸짓이다
무턱대고 곁을 후비고 들어오는 관습적인 무례를 범하지만, 대부분은 보헤미안의 피가 흘러 어느 날, 안녕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지
누군가의 곁을 위해 나는 소망한다
바람, 너처럼 자유롭지 않고 바위, 너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도플갱어, 누군가의 서러운 잉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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