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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후 시인 / 불새처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9.

김경후 시인 / 불새처럼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미의 해일도 일으켜보자, 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과 소음, 그런 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건 더더욱 말고,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를 쓰고 싶다,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죽고 싶다, 아주 자주, 아주 많이, 보석들 대신 비석들을 갖고 싶다, 비석들도 죽이고 죽고 싶다, 비석들 위로, 너무 많이 죽은 시들을 밤하늘처럼, 피와 황금의 사막처럼 펼치자, 나는 많이 죽고 싶다, 잿가루보다 무수히

 

 


 

 

김경후 시인 / 입술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검은 수의 갈아입는

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김경후 시인 / 해바라기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가 왔다, 나는 그 암캐를 알지 못하지만, 그 정오부터 알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흑점의 온도로 울부짖는 암캐, 그 울부짖음 집어삼키는, 암캐의 뱃속에, 박히는 칼, 나는 요리는 모르지만, 뱃속보다 깊은 어둠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칼끝에서 첫 핏방울이 떨어질 때부터, 시퍼렇게 목줄기가 찢어질 때부터, 그 목줄기 울음 따라 핏줄이 터질 때부터, 나는 마음에 없는 말과, 말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내 목줄기를 향해 달려오는 톱니바퀴, 돌고 도는 톱니바퀴의 울음도 울 줄 알았다, 암캐처럼, 암캐가 없어도, 땡볕에, 나는 그 암캐와 함께 끌려갈 줄 알았다, 암캐처럼, 동네 냇가에 아주 오랫동안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나는 그 암캐를 알지 못하지만, 그날부터,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가 됐다, 그날 저녁, 부엌 구석에서 나는 쩝쩝거리며 고기를 먹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뱃가죽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 수 있었다

 

 


 

 

김경후 시인 / 먹감나무 옷장

 

 

거대한 벼루 같은 밤

먼 옛날을 닫는다

곧 돌아올 오늘마다 열었다 닫는다

감나무 단 냄새를 연다

먹 냄새를 닫는다

삐거덕거리던 새벽 여섯 시들을 연다

늙은 좀벌레들이 하얗게 죽은 밤 열한 시들을 닫는다

곰팡이 핀 북쪽 벽을

비어 있는 나프탈렌 주머니를

닫는다 열고 닫는다

먹감나무 가지에 걸렸던 바람의 묵음들

구멍 난 바지들

닫고 닫는다

땔감이 되고 잿가루가 될 때까지

연다 닫는다 삐그덕거린다

집을 떠받들 뿌리 내릴 때까지 닫아버리기 위해

연다

빈 옷걸이 텅 빈 고요 속

거꾸로 매달려 몸을 떠는 집유령거미

검은 집 다락 속 먼 이야기에 닿는다

 

 


 

김경후 시인

197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열두 겹의 자정』『오르간, 파이프, 선인장』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