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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영은 시인 / 달콤한 그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0.

강영은 시인 / 달콤한 그늘

 

 

탑골 공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아이,

땀투성이 이마에 땟국물까지 질질 흘리면서

아이스크림을 빨다 말고 문득, 나를 쳐다 본다

내가 아이스크림이 된 것처럼 흠칫 놀란다

바람은 볼록하니 볼을 부풀리고

구름 아이스크림은 유리창에 줄줄이 흘러내린다

아이의 입 속으로 와르르 내가 빨려든다

세상이 온통 아이스크림이라는 듯

입술에 온 힘을 싣는 저, 집중력!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 빠는 일이라는 걸

세상의 어떤 그늘도 맛있다는 듯 내 젖줄을

쪽쪽쪽, 쭉쭉쭉, 빨아먹던 아가에게 몸을 통째 내주던

그때 진작 알았다

먹는 입에서 먹여주는 입이 된 나는 그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그늘이었다,

내 몸의 땡볕조차 저절로 사라지는 그늘이었다

두 볼을 고무풍선처럼 불었다 놓을 때마다

시원한 그늘 한 뼘씩 자라는 아이,

작은 입 속으로 7월 무더위에 달구어진 내가 한순간

사르락 사르락 녹아내린다

 

*문창 2009년 여름

 

 


 

 

강영은 시인 / 나는 섬 밖으로 날지 못한다

 

 

메일은 철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 속으로 철새들이 수시로 날아든다

가창오리, 논병아리, 장다리 물떼새 같기도 한

발가락을 뒤쫓아나가 보면  

이름 없는 새들이 깜빡 깜빡, 하늘을 빠져나간다

 

당신은 금이 간 별처럼 하늘 저쪽에서

반짝인다

 

핼리혜성처럼 희미한 별빛이 불시착하는

태양계의 아웃 도어를 열고 철새좌를 찾아본다

당신은 여전히 수신되지 않는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삭제,

나에게 수신 불가의 나날을 전송한다

나는 내게 너무 커다란 섬,

 

나는 섬 밖으로 날지 못한다

 

 


 

 

강영은 시인 / 왜목마을*을 지나며

 

 

이곳에 이르자

 

눈시울 속에 폭발하는 찰나의 빛들은 눈부신 어둠이어서

햇빛에 숨죽인 그녀의 얼굴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왜가리의 목처럼 구부러진 해안선이 그녀의 배경이기 때문일까

 

가슴께의 봉긋한 섬들이 젖무덤처럼

아늑하게 보였던 것인데

그녀가 젖을 물리는 국화도와 장고항 사이,

항아리처럼 부푼 그녀의 몸이 지고 있었다

 

물결마다 황홀하게 스러지는 꽃무덤 저, 화염바다에

내 언제 몸을 내주었던 것일까

 

개펄에 고개 묻은 몇 척의 목선木船들과 잔물결 가득 이는 꽃잎 사이

생의 한 지점에서 숱하게 피고 졌던 꽃이기나 한 듯

어두워가는 내 몸 속으로도 가뭇한 밀물이 들었던 것인데

 

조개나 고동처럼 다 캐낼 수 없는 그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길

 

저 풍경은

왜가리처럼 구부러진 목으로 내 생의 배후를 기웃거릴 뿐

그 구부러진 곡선曲線으로 여기까지 온 내 몸의

밀물 드는 소리 듣지 못한다

 

*충청남도 서해의 땅 끝 마을로서 일출(日出)과 일몰(日沒), 월출(月出)까지 모두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장소로 유명하다 왜가리의 목처럼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라고 해서 왜목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영은 시인 / 물로 지은 옷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면 푸르게 굽이치는

바다, 바다는 내게 헤엄치는 법을 가르쳤다

 

그 투명한 바다의 몸이 독을 내뿜었던 적이 있다

벌겋게 독이 오른 그날,

바다는 나에게 옷 입는 법을 가르쳤다

 

옷은 내게 스스로를 벗는 사랑을 가르쳤다

옷은 내게 몸이었다

옷을 벗음으로 나는 여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선다

형형색색의 물결 속에서 벗기거나 벗어야 하는

옷들은 자주 출렁인다

파고가 높을수록 더욱 출렁이는 도시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오늘도 나는 유유히 헤엄친다

함부로 옷을 벗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던,

 

어머니, 내게 바다를 물려주셨다

 

 


 

강영은 시인

1956년 제주에서 출생. 2000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녹색비단구렁이』 , 『상냥한 시론』 등이 있음. 시예술상, 한국시문학상,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세종 우수도서 선정. 서울과학기술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