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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무소부재 (無所不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0.

구상 시인 / 무소부재 (無所不在)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비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내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邃)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 모양

 애련(哀憐)스레 계십니까

 

 휘영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이 연장(連 )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을 조응(照應)하여

 세월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 있는

 청렬(淸冽)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 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태풍(颱風) 휘몰아오고

 해일(海溢) 일며

 천둥 번개 치듯

 엄위(嚴威)로서 계십니까

 

 허허창창(虛虛蒼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무애(無涯)도 너머

 아련히 계십니까

 

 칠색(七色)의 무지개 위에

 성좌(星座)를 보석자리 삼아

 동천(東天)의 일출(日出)마냥

 휘황스레 계십니까

 

 이화(梨花), 도화(桃花) 방창(方暢)한데

 지저귀는 저 새들과

 옥류(玉流)에서 노니는 고기떼들의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계십니까

 

 풀잎 뜯어 새김하며

 먼 산 한 번 구름 한 번 바라보는

 산양(山羊)의 무심으로 계십니까

 

 저고리 섶을 연 젖무덤에 안겨서

 어미를 쳐다보는 아기의 눈빛같은

 무염(無染)속에 계십니까

 

 저 신선도(神仙圖)

 흰 수염 드리운 그윽한 미소로

 굽어 살피고 계십니까

 

 이렇듯 형상으로 섬기지 못하고

 온누리의 바탕에

 붓 안 닿은 여백같이

 

 시공(時空)을 채워 계심이여!

 

 무소부재, 무소부재의

 하느님!

 

 


 

 

구상 시인 / 혼자 논다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ㅡ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길래

ㅡ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ㅡ 몰라!

란다. 그래 나는

ㅡ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ㅡ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ㅡ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ㅡ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