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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윤숙 시인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백자 달 항아리가 보인다 이음새 말끔히 다듬어진 둥근 궤적 따라 동굴처럼 깊어지는 몰입의 경지 침묵의 모퉁이 돌아 나오는 망치질 소리 발효의 시간
그 백자 항아리 속 햇살 구워지고 소나무 향이 번지면 시간의 장작은 붉게 타 오르고 무심한 아름다움이 균열의 틈을 메우는데
거기 대나무 숲이 있는가 달빛은 어둠으로 휘어지며 새의 사랑은 변방에서 깊어지는데 더러 빠지는 깃털은 누구의 것인지 금낭화도 야윈 몸을 늘어뜨리며 고요의 목덜미를 적신다 허공의 뼈대를 세운다
숨겨진 달 항아리는 그늘 냄새를 풍기는 어둠 어둠의 주름이 환하게 펴지면 향기의 다락방엔 삐걱이는 사다리 뿐
그 곳에서 신라가 발효 중이다
봉윤숙 시인 / 너도밤나무
너도, 라는 말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위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너도는 남이 붙여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붙여주는 위안 너도밤나무 나도 밤나무 꽃도 열매도 잎사귀도 다르지만 밤나무 하나로 흔들린다 숲의 나무들은 다 다르지만 흔들리는 소리로 함께 서 있다 이파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흔들리는 소리도 같고 나뭇가지의 간격도 같다는 것이다 너도 나도 라는 말은 서로 주위를 서성거리는 사이 잎이 닮아서 짙푸른 숲이 되고 하나로 뭉치는 사이 누가 나를 위로 할 때 나도 너도 나무가 되거나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것이다 한 이름을 나누어서 서로가 될 수 있다 숲은 서로 기울여 마주 하고 같은 겨울과 같은 오솔길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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