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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영배 시인 / 비누가 닳다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0.

신영배 시인 / 비누가 닳다

 

 

 소리없는 그가 뒤에 와  있을라치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바지주머니 속에는 늘 조각칼이  들어  있었지 그가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구멍 속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네  그는 없다가도 뒤에 있고 있다가도 거기 없는 조용한 걸음의 여자였어

 

 조각가 K는 우선 거대한 비누를 만들었지  자신과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그 비누를 조각했어 작품 K-B107은 욕실에 세워졌네 벗은 여자가 향기로워라

 

 그녀는 어디부터 닳았을까?

 

 그는 매일 손에 물을 발라 그녀를  만졌다  살굿빛  거품들이  피어났다 포옹은 미끄러워 유방이 물고기처럼 두 사람  사이를 빠져 나갔다 수천억 개의 거품 속에 수천억  개의  포옹이  맺혔다 키스는 짧고 그가 수천억개의 거품을 입에 물고  쓰러졌다  타일이 경련을 일으켰다 동그란 거품 속에 네모난 창이 틀어박히고 소녀가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자살이 수천억 번  재현되었다  거품들이 한순간 물에 씻겨 수챗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닳았다 오늘의 거품은 어제의 거품보다 소규모다 오늘의  작품은 어제의 작품보다 닳아 있다

 

 비가 무섭게 내렸어 욕실의 천장을 뚫고  빗줄기는 검은 수챗구멍을 향해 달렸지 거품들을 데려갔지 사람들은 K의 바지주머니 밖으로 빠져나온 조각칼을 조심조심 피했다네 그들과 K사이에는 비가 굵어졌어 빗줄기만으로 그는 간단히 가려졌지 녹아내렸지

 

 그가 욕실문을 열었다 오늘의 작품은

 

 살구비누만한 종양

 

 


 

신영배 시인

1972년 충남 태안에서 출생. 2001년 계간 《포에지》에 〈마른 피〉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기억이동장치』(열림원, 2006)와  『오후 여섯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문학과지성사, 2009) 가 있음. 제2회 김광협 문학상(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