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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시인 / 커피의 신
커피의 신은 유리잔처럼 생겼다 한 손엔 우박, 한 손엔 박하사탕을 쥐고 있다 그의 목은 가늘고 긴 빨대 같기도 하고 버섯 자루 같기도 하다 그는 어제 별들이 잔뜩 엎질러진 숲에서 왔다 그 숲에선 표범과 꽃들이 커피콩을 갈고 있다 외로운 것은 향기롭다, 향기로운 것은 더 외롭다, 까마귀들이 부리로 공중에 글씨를 쓴다 커피의 신은 커다란 귀를 열고 음악을 들으며 터키와 쿠바를 생각한다 그의 얼굴엔 삼각형 모양 눈송이가 떠 다닌다 방향을 잃은 우주 셔틀 같은 불시착이 반복된다 그에겐 온몸이 희고 검은 털로 덮인 개가 있고 개는 세상에서 가장 시커먼 액체다 개의 혀는 개의 몸의 안쪽을 애무한다 가시라곤 하나도 돋지 않는 들판에 그는 서 있다 밤이 깊어가면 별들이 뜨고 그가 증류하고 남은 어떤 오두막엔 점박이 애벌레처럼 생긴 사람들이 꿈틀꿈틀 그의 신전에 모여 커피나무를 숭배한다 약간의 쓴맛은 약간의 슬픔과 약간의 위로 얼굴이 까맣게 탄 아이들이 목을 길게 늘여 하늘에 올라 탄화된 볍씨를 추수한다 커피의 신은 흰 유리잔처럼 생겼고 그의 눈알엔 가느다란 실뿌리가 내린 어스름이 자란다 달도 없이 캄캄한 밤 그는 혼자 세상에 왔다
계간 『문학과 사람』 2021년 봄호 발표
최금진 시인 / 건망증
하나의 개념을 다른 개념들이 잡아당기고 있는 겁니다 잡아당겨서 반으로 접은 색종이에 검은색을 칠하는 겁니다
기억에 나팔관이 없다면 기억은 거미를 잉태하지 못합니다 거미는 양파처럼 매운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거대한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어디든 뿌리를 내리기도 합니다
완전한 망각을 원합니다, 완전한 망각을 원하는 사람은 종종 엄청난 크기의 혹성을 짊어지고 밤하늘을 떠도는 사람입니다 그의 발이 허공에 놓여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는 그래서 영원히 추락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검은색을 또 하나의 검은색이 당기고 있습니다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대답이 없는 대문 안에는 긴 수염을 기른 남자가 문밖을 엿듣고 있습니다 왔나요, 왔다가 가는 건가요, 다시는 오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남은 건 기다란 장대와 지평선 그는 그 지평선 끝에서 장대로 설익은 별들을 털어 냅니다
기억은 언제나 더 깊고 완전한 망각을 원하기 때문에 어떤 날 밤하늘에는 작은 개미 한 마리가 그토록 쩔쩔매며 자신의 무너져내린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지우기 위해 더 거대한 어둠을 불러 모으고 우리의 눈동자는 우리의 침몰을 그 안쪽에 잉태하는 겁니다
누군가 우리를 거기다 내다 버리는 겁니다 상처가 하찮아질 때까지 당신은 거기에 자꾸 쌓여가는 겁니다
계간 『문학과 사람』 2021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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