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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선미 시인 / 나혜석과 함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0.

주선미 시인 / 나혜석과 함께

 

 

여자 혼자, 아이들도 떠나 휑한 집

주말 내내 지키도록 버려두고

남자 홀로 동백꽃 찾아 남쪽으로 가버렸다

 

정작 집을 비우고 나서는

행선지를 옮길 때마다 전화벨을 울려대는

남자를 피해 무작정 부산행 열차를 탔다

축지법을 쓰듯 시속 300km 넘게

남쪽으로 달리며 갇힌 나를 차창 너머 던지다가

문득 열차 잡지 표지에 실린

화가 나혜석의 자화상을 본다

 

최초의 여자 동경 유학생 출신 화가이고

시인인 나혜석의 기울어진 몸에 우울이 가득하다

남자들을 앞서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보이지 않는 붓들 뭇매를 맞고

열린 세계를 찾아 파리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이혼이라는 가혹한 숙명을 맞았다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나혜석이

남 같지 않아 표지 속 그녀를 꼭 껴안는다

 

그림도 시도 앞서가는 그녀를 지키지 못해

행려병자로 52세에 삶을 마감했다지만

문득 그녀가 걸어간 길이 낯설지 않아

함께 부산 거리를 걸었다

 

오륙도 등대를 벗어나

가고 싶은 대로 나를 풀어놓았다

 

불꽃같은 여자 나혜석이

내 안에 새롭게 피어났다

 

여행에서 돌아 온 저녁

잠시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전화 울려대던 그 남자

커피 향처럼 마음이 풀렸는지

오랜만에 커피 한 잔을 손수 끓여 내놓는다

비로소 여자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눈에 보인 모양이다

 

청운 양로원에 든 나혜석이 못 간 길

남은 봄에는 함께 꼭 걸어봐야겠다

 

 


 

 

주선미 시인 / 가시, 붉은 꽃

 

 

내 몸에 달이 살고 있다

 

가시 달린 선인장 한 그루 몸속에 키워내는 일은

온 지구를 흔드는 일

 

물 한 모금 비치지 않는 타클라마칸 한가운데

화끈거리는 생명의 꽃을 피운다

 

거친 파도 갈기가 숨기고 있는 암초처럼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아픔에도

난파되지 않는 돛단배가 된다

 

그 검푸른 속 들여다보면

생명을 활짝 피우는 자리

진주조개이듯 스스로 가시를 삼켜

꽃을 피우는 여자가 숨어 있다

 

식구들 두 어깨에 짊어진 채

쓰라린 가시 헤치며

다디단 바람을 잉태하는 어머니

 

밝고 따뜻한 감촉 꿈꾸다

날 선 유리 벽 너머로 스며들어보지만

축축하고 차가운 데만 만져진다

 

 


 

주선미 시인

충남 태안 출생. 2017년《시와 문화》신인상 등단. 시집『안면도 가는 길』,『일몰, 와온 바다에서』있음. 《시와 문화》2019 젊은 시인상, 충남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