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란 시인 / 여러 가지의 얼굴
생일이 없는 나이를 먹고 나는 여러 개의 얼굴 밖을 도망다닌다 수많은 이름을 매달고 숲에 도착했다 메아리가 된 당신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숲이 태양을 가렸으므로 길은 캄캄하다
뒤를 돌아볼수록 견딜 수 없는 정글이 생겨나고 사방으로 흩어진 이름을 기억하며 참고 있던 얼굴이 쏟아진다
검붉은 얼굴 새파란 얼굴 샛노란 얼굴 색깔 없는 얼굴을 사람들은 곧잘 잊어버린다
어디선가 검은 사과를 베어 먹은 얼굴이 다가온다 오래전에 죽은 내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당신들 웃자란 얼굴을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바닥으로 엎질러지고 마는 ***
금란 시인 / 동사무소로 간다
할머니 등에 업혀 면사무소를 갔다 할머니 이빨 사이로 새어 나간 금냄이 호적계장 귓등으로 들은 금란이는 원래 금남이었다 쇠 같은 손주가 태어나길 기다렸던 할머니는 끝내 금남을 기다리다 돌아 가셨다
이름을 쫓아내지 않아도 까마귀에서 까마귀 냄새가 나듯 금냄이나 금란이나 하나인 나로 가득하다
앞으로 보면 금란이요 뒤로 보면 금냄이가 뒤통수에 따라붙는다
세 개의 무거운 이름에서 균형 잡힌 커피 향이 흘러나오도록 자판기 구멍에 동전을 넣고 기다린다
복주머니, 복주머니라고 부르니 사방에서 복이 떨어진다
황금알이 된 금란이 죽은 할머니를 업고 동사무소 간다
금란 시인 / 빵의 시간
만찬이 끝난 뒤 식탁 위, 빵의 목덜미는 하나의 방향으로 구부러진다
입맛 돌게 했던 노릇한 빵에 참을 수 없는 구멍이 생기고 곰팡이가 자란다 어둠 속에서 하얀 시간을 지워내는 발길질이 뜨겁다
나의 밤은 생크림같이 흘러내리고 달콤했던 빵의 감각을 되새김질하며 몽롱한 쪽으로 몸이 기운다 눈꺼풀 위로 빵의 그림자가 순간 지나간다
부풀었다 주저앉고 늘어졌다 쪼그라지는 빵의 시간에 식탁은 허기를 모르고 어항 속 물고기는 늙어간다
살을 찢고 튀어나오려는 빵의 이야기 접시에 말랑말랑한 중얼거림이 동그랗게 앉아 있다
밤새도록 발버둥 쳐도 건너가지 못한, 빵 속에 빵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차의갑 시인 / 바지락 나비 외 2편 (0) | 2021.07.31 |
|---|---|
| 주선미 시인 / 나혜석과 함께 외 1편 (0) | 2021.07.30 |
| 백무산 시인 / 무소유 외 1편 (0) | 2021.07.30 |
| 금은돌 시인 / 화분 외 3편 (0) | 2021.07.30 |
| 공광규 시인 / 모과꽃잎 화문석 외 3편 (0) | 2021.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