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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은영 시인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1.

진은영 시인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시인 / 올란도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매들을 신에게 헌납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져갔다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찌 가르쳐야 하나요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과 함께 물 밑으로 사라졌다

나의 하느님, 전당포에 앉아계신 인색한 하느님

얼마나 값을 쳐주시려고

이 많은 영혼을 당신 속주머니에 챙겨 넣으셨나요?

겨우 고관대작을 위한 은그릇 몇 개 내어주실 작정이면서

올란도, 나 올란도는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났다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나 자신의 현존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두 눈과

본 것을 말해야 할 작고 흰 입술을 가지고서

 

올란도, 우리가 모든 슬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진은영 시인 /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박사).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과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와 그밖의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등의 철학하기와 관련한 저서 등이 있음. 2009년 제1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56회 현대문학상, 2013년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3년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 및 인문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