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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시인 / 고양이 침대
그 여자는 이제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깊은 밤 그 여자가 뒤척일 때 침대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낸다 그 여자는 방에 남아 있는 고양이들을 모두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핸드백 속 술 냄새 풍기는 고양이를 내보낸다 옆으로 쓰러진 하이힐 속 고양이를 내보낸다 의자 위에 냉큼 올라앉은 고양이를 내보낸다 피곤한 밤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젖은 고양이 속눈썹을 떼어낸다
깊은 밤 그 여자는 침대를 옮겨 다니며 잠잔다 그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제모를 한다 종아리에 쉼 없이 돋아나는 고양이 털을 깎는다 그 여자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은 거울을 다시 들여다본다
아흔아홉의 남자가 거울 속 그 여자를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아흔아홉의 남자가 지나간 거울 속에 그 여자가 홀로 남는다
고양이는 이제 그 여자를 기르지 않는다 깊은 밤 침대가 뒤척일 때 그 여자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낸다 고양이들은 방에 남아 있는 그 여자를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계간 『시와 표현』 2013년 가을호 발표
조혜정 시인 / 입 속의 도시 1
여자가 켜놓은 텔레비전 속에서 밤새 열두 명이 죽는다 열두 명의 죽음엔 네 명의 범인과 다섯 명의 인질이 있다 범인을 쫓다가 세 명의 행인이 총에 맞는다 두 번의 달콤한 키스 중 하나는 살인자와 죽은 여자의 것이다
여자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를 쫓아 담장을 넘는다 그 사이 일곱 줄의 문장을 놓치고 책갈피에 커피를 엎지른다 젖은 얼룩이 마르는 동안 골목을 지나 밤의 인파 속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그림자, 살인은 랜덤으로 일어난다 너무 쉽게 잡히는 건 모욕이야 변명하듯 여자가 중얼거릴 때 빈 담뱃갑을 구기며 범인은 형사에게 라이터를 빌린다 이 밤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여자는 알고 있다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고 버릇처럼 도시의 뒷골목을 흘러다니는 동안 원터치캔 따듯 살인이 이어진다 스쳐 지나간 담배연기만으로도 여자는 살인자를 가려낼 수 있다 지문 없는 어둠이 여자의 목을 누른다 벽에 붙여놓은 세계지도 속에선 지금도 일 초에 한 명씩 죽어간다구, 빈 총구처럼 차가운 밤의 창문들, 텔레비전 불빛이 비명처럼 새어나온다
ㅡ 계간 <미네르바> 2008 가을호 (신진조명)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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