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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도현 시인 / 고니의 시작(詩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1.

안도현 시인 / 고니의 시작(詩作)

 

 

  고니 떼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 꽁무니에 물결이 여럿 올올이

  고니 떼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 물결이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다

  강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수면의 검은 화선지 위에

  고니 떼가 붓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것,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있지만

  웬일인지 썼다가 고요히 지워버리고

  또 몇 문장 썼다가는 지우고 있는 것이다

  저 문장은 구차한 형식도 뭣도 없으니

  대저 漫筆이라 해야 할 듯,

  애써 무릎 꿇고 먹을 갈지 않고

  손가락 끝에 먹물 한 점 묻히지 않는

  평생을 쓰고 또 써도 죽을 때까지

  얇은 서책 한 권 내지 않는 저 고니 떼,

  이 먼 남쪽 만경강 하구까지 날아와서

  물 위에 뜻 모를 글자를 적는 심사를

  나는 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쓰고 또 쓰는 힘으로

  고니 떼가 과아니, 과아니, 하며

  한꺼번에 붓대를 들고 날아오르고 있다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저 넘치는 필력을

  나는 어찌 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안도현 시인 / 시창작강의

 

 

  내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선배들이 말했죠

  고독한 체하지 마라 고독에 대해 쓰지 마라 제발 고독, 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마라

 

  나는 40년 넘게 고독을 피해 다녔죠 고독이 다가오면 앞발로 걷어차 버렸고 강가에 갔을 때는 얼음장을 강물에 던져 버렸죠 얼음에 살을 벤 교각이 울더군요

 

  고독하지 않기 위해 출근을 했고 밥이 오면 숟가락을 들었죠 강연 요청이 오면 기차를 타고 갔고 어제는 대통령선거를 도왔어요 오늘은 다초점렌즈를 바꾸러 안경점에 갔고요 오래 읽지 못한 시집 세 권과 문예지 열댓 권을 새벽에 읽었어요

 

  멀리 피하면 금세 따라붙고 고개를 돌리면 얼굴이 바뀌더군요 고독한 상점들 앞에서 멧돼지가 트럭을 들이받은 거 메모해두세요 고독하지 않으려고 간판을 내다 걸었다는 것도

 

  흰 종이를 들여다보느라 밤을 하얗게 새웠죠 나는 눈발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도 모르고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손아귀 속의 새를 놓아주듯이 나를 풀어주는 거죠 고독하게 허공을 밟고 가는 새처럼 구름으로 밥을 말아 먹는 연기처럼

 

  당분간 전화는 하지 말아주세요 고독해질 때까지

  나는 점점 고독이 그리워져요 내게는 고독한 날이 오지 않아요

 

 


 

 

안도현 시인 / 월식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달을 따주겠다고 했겠지요

 

  달의 테두리를 오려 술잔을 만들고 자전거 바퀴를 만들고 달의 속을 파내 복숭아 통조림을 만들어 먹여주겠노라 했겠지요

 

  오래 전 아버지 혼자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간 밤이 있었지요 사춘기의 풀벌레가 몹시 삐걱거리며 울던 그 밤,

 

  그런데 누군가 달의 이마에다 천근이나 되는 못을 이미 박아 놓았던 거예요 그 못에다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를 걸어 놓은 것은 달빛이었고요

 

  세월이 가도 늙지 못한 아버지는 포충망으로 밤마다 쓰라리게 우는 별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끌어 모았을 거예요

 

  아버지 그림자가 달을 가린 줄도 모르고 어머니, 그리하여 평생 캄캄한 이슬의 눈을 뜨고 살았겠지요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군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낙동강〉으로 등단. 1984년 동아일보 '서울로 가는 전봉준' 신춘문예 당선. 장수산서고등학교 교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부교수.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수상>198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1996 시와 시학상 젊은시인상. 1998 제1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2 제1회 노작문학상. 2002 제10회 모악문학상. 2005 제12회 이수문학상. 2007 제2회 윤동주 문학상 문학부문.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2012 임화문학예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