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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시인 / 오늘처럼
하루살이 떼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더 이상 뵈는 게 없다고 지금 여기,
발 디딜 곳 없는 막막한 허공뿐이라고
자욱하게 죽자 살자 달려든다
눈앞에선 환풍기 숨찬 동력이 들끓고 있다
배영옥 시인 / 적막이라는 상처
적막은 꿈꾸는 자의 이름과 동일하다
다만 들을 귀와 마음이 없을 뿐
새벽 세시의 단면을 잘라보면 시간의 단층 사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의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적막이라는 붉은 상처를 본다
풀벌레의 시간을 지나 새의 시간을 지나 매미의 시간을 지나
적막은 결코 텅 비어 있지 않고 적막은 결코 눈멀어 있지 않고
적막은 귀 막은 몸을 향해 발언하는 빈틈없는 소리들이다
배영옥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중에서
배영옥 시인 / 수화
손끝에서 피어나는 저 꽃의 말들을 좀처럼 읽을 수 없다
허공에 뱉은 말들 팔랑팔랑 운명을 거부하는 말의 꽃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고 말 꽃의 날개들
말을 다 뱉어내고도 꽃섬 가득 흩날리는 꽃잎들
손끝에서 사라지는 그리움의 말들
『뭇별이 총총』, 배영옥, 실천문학사, 2011년, 62~63쪽
배영옥 시인 / 언제나 지척에 있다
자작나무 가로수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며칠 전 책 읽어주던 단풍나무도 없어지고 민둥치만 남았다 단풍나무 그늘도 함께 사라졌다
자작나무 잎들이 하얗게 들떠 있다 바람이 슬쩍 건들자 몇 안 남은 이파리들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댄다
눈여겨보면 곧 죽어 없어질 것들.... 죽음은 언제나 지척에 있다
배영옥 시인 / 만월
어머니는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식은 아랫목은 다신 데워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달라붙어 서로 몸 뒤채며 체온을 나눠 가지다가 문득,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에 문 열고 마당 내다보니
차고 맑은 우물 속 어린 동생에게 밥 한술 떠먹이고 싶은 고봉밥그릇이 떠 있었다
시집 『뭇별이 총총』(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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