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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영옥 시인 / 오늘처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31.

배영옥 시인 / 오늘처럼

 

 

하루살이 떼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더 이상 뵈는 게 없다고

지금 여기,

 

발 디딜 곳 없는 막막한 허공뿐이라고

 

자욱하게

죽자 살자 달려든다

 

눈앞에선

환풍기 숨찬 동력이

들끓고 있다

 

 


 

 

배영옥 시인 / 적막이라는 상처

 

 

적막은

꿈꾸는 자의 이름과 동일하다

 

다만 들을 귀와 마음이 없을 뿐

 

새벽 세시의 단면을 잘라보면

시간의 단층 사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의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적막이라는 붉은 상처를 본다

 

풀벌레의 시간을 지나

새의 시간을 지나

매미의 시간을 지나

 

적막은 결코 텅 비어 있지 않고

적막은 결코 눈멀어 있지 않고

 

적막은 귀 막은 몸을 향해 발언하는

빈틈없는 소리들이다

 

배영옥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중에서

 

 


 

 

배영옥 시인 / 수화

 

 

손끝에서 피어나는 저 꽃의 말들을

좀처럼 읽을 수 없다

 

허공에 뱉은 말들

팔랑팔랑

운명을 거부하는 말의 꽃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고 말 꽃의 날개들

 

말을 다 뱉어내고도

꽃섬 가득

흩날리는 꽃잎들

 

손끝에서 사라지는 그리움의 말들

 

『뭇별이 총총』, 배영옥, 실천문학사, 2011년, 62~63쪽

 

 


 

 

배영옥 시인 / 언제나 지척에 있다

 

 

자작나무 가로수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며칠 전 책 읽어주던 단풍나무도 없어지고

민둥치만 남았다

단풍나무 그늘도 함께 사라졌다

 

자작나무 잎들이 하얗게 들떠 있다

바람이 슬쩍 건들자

몇 안 남은 이파리들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댄다

 

눈여겨보면 곧 죽어 없어질 것들....

죽음은 언제나 지척에 있다

 

 


 

 

배영옥 시인 / 만월

 

 

어머니는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식은 아랫목은 다신 데워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달라붙어

서로 몸 뒤채며

체온을 나눠 가지다가 문득,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에

문 열고

마당 내다보니

 

차고 맑은 우물 속

어린 동생에게 밥 한술 떠먹이고 싶은

고봉밥그릇이 떠 있었다

 

시집 『뭇별이 총총』(실천문학사, 2011)

 

 


 

배영옥 시인(1966-2018)

1966년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뭇별이 총총』(실천문학, 2011)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가 있음. '천몽' 동인으로 활동. 2018년 6월11일 지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