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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세은 시인 / 도드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

기세은 시인 / 도드리*

 

 

나는 당신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어른이란 의미를 몰랐다

매일 매일

당신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날이 귀와 눈이 멀어져갔다

반년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똑같은 설명만 반복했다

드디어 모든 감각을 상실하자

나는 어른 흉내를 내었다

당신은 나를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내가

매일 매일

당신에게 콧노래를 불러주며 춤을 췄다

당신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어른에 대한 불신을 키워 나갔다

당신은 반항하기 시작했고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방심한 나머지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제 당신이 어른이 될 차례다

나는 색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다

 

* '다시 돌아서 들어간다'는 뜻.

 

 


 

 

기세은 시인 / 마녀 사냥

 

 

그녀는 원래부터 마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비밀 하나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토로하려 했으나 친구들은 외면했다

답답함에 매일매일 가슴을 두들기다

파란 멍이 생겼다

눈물이 났다

파란 눈물이었다

파란 눈물을 병에 담아두고

매일 밤 파란 눈물을 머리카락에 발랐다

그녀가 파란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파란 머리카락의 색다름에 반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자랄수록

병에 담긴 파란 눈물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가슴을 세게 두들겨도

더 이상 파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빈 병만 남았다

파란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친구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즉단했다

 

 


 

 

기세은 시인 / 베스트 프랜드

 

 

친구야, 친구야

작년 너와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나는 앞날이 막막하다고 했어

나는 다 지나간다고 했어

얼마 전 우연히 너를 보았어

너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

깜짝 놀랐어

눈알이 보이지 않았어

그동안 너에게 무심했던 나는

크게 낙심했어

세상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

눈을 감아도 다 보였어

그래서 너의 눈알을 되찾아주기로 했어

먼저 파출소에 신고하고

눈알이 갈만한 장소에 눈알 찾기 포스터를 붙였어

라디오 사연으로 올리기도 했지

방송되자 눈알을 비난하는 댓글이 빗발쳤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눈알을 생각하자

눈알이 빠질 듯 아팠어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알이 네 개나 있었어

너를 찾아갔어

너는 예전보다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줬어

내 덕분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했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너와 헤어졌어

집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네가 생각나지 않았어

다음 날

나는 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어

 

 


 

기세은 시인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제7회 《시작》 신인상 공모에 〈내 슬픈 전설의 25페이지〉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