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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우대식 시인 / 바빌론 강가의 아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

우대식 시인 / 바빌론 강가의 아침

 

 

새벽 거리에 나와 인사를 건넸다

모든 것은 완벽했고 그대로 였으며

술에 취한 몇몇 사람들이

생각과 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애를 쓰다가 돌아갔다

아무 것도 옮기지 못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혼자 대지의 기운을 빌어 읊조렸지만 신(神)은 듣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히 여전한 세상,

흘러내린 이어폰을 다시 귀에 꼽고 보니엠을 듣는다

햇살이 내리쬐는 자메이카를 떠올리며 썬그라스를 낀다

세상은 더 어두워졌다

보니엠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오래 전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이곳에 끌려왔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식민(植民)의 흔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 낯선 땅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이 눈물을 어디에 뿌려야 하나

강가에 도착했을 해는 다시 떠올랐고

시온으로 가는 티켓은 할인 된 가격으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우대식 시인 / 아버지의 발자국

 

 

꾹꾹 눈 쌓인 산소를 밟으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물어도 답할 수 없습니다

어린 날 만종 驛 어느메 즈음에서

당신과 함께 걷던 먼 들판을 기억합니다

그 들판에 눈도 내리고 저녁놀도 지곤 하였습니다

오늘 당신과 나의 거래(去來)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고 무엇이 왔습니까

아마도 번뇌 같은 것이겠지요

그물과 같이 던져진 그것

눈이 시린 하늘을

새가 날아오를 때

당신과 나의 거래는 원만히 성사된 것이지요

이제 다시 만종 驛 즈음에서 서성입니다

기사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풀리지 않는 답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아버지의 발자국이 흐려졌습니다

 

 


 

 

우대식 시인 /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아주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천년의시작, 2003) 와 『단검』『설산 국경』 그리고 그 밖의 저서로는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2005)이 있음. 「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현재 평택 진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中. 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