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전형철 시인 / 저녁의 파수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

전형철 시인 / 저녁의 파수

 

 

척추를 곧추세우고

허공의 계단을 별이 오른다

 

관목이 자라는 숲에 앉아

빗방울이 만드는 그물과 손바닥을 번갈아 본다

 

반쯤 가린 커튼을 열어두고

낮이 누웠다 일어난 자리

 

어느 저녁에는 일 인분의 공기가 넘칠 때 있다

 

가랑이 긴 그림자는

이 단단한 바닥을 다 가리지 못한다

 

꽃가루가 그려놓은 탁본

 

이름의 바깥

 

쓸려온 바람의 애먼 주름을

 

냄비에 데인 받침 같이 가슴에 새긴

이 저녁의 소요를,

 

신탁의 곁을 혼자 서성거리는 동안

다른 이름들을 줍는다

 

수군거리는 빛을 심장의 끄트머리에 걸어둔다

 

자성을 잃은 자침처럼

놀잇감을 잃어버린, 더딘 계절

 

부기 빠진 마른 풀이

밤새 하늘을 벼린다

 

 


 

 

전형철 시인 / 다시 죽다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존재의 허무를 그림자로 이끈 후

혼자이길 부인했어도

끝내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내 삶은

앞서간 망자의 몫이었다

 

희끗한 산봉우리 너머

설움이 불러 세운 빛부신 별은

이미 죽어 간 이의 넋이

잔존의 의미로 와 스러진다는 것과

즈믄 해 그림자

강기슭에 붉은 머리를 풀면

동박새 울음으로 내리는

길고 긴 설움도

달빛에 감기는 바람이

씻어 간다는 것을 알아 버린 후

죽은 영혼을 이고 사는 이질감에

컥컥 대는 허깨비였다

 

생존의 계단은 하늘을 향해

길게 뻗쳤으나 보이지 않았고

드리워진 길을 찾았을 때

그 시작은 이미 지워져

오를 수 없는 허상의 계단임을 알고 난 후

헛헛한 눈물에 젖어 산다

 

누군가 기억해 주길 소망하지 않는

떠난 이의 잊혀진 기억 속이라 해도

끝내 머물고 싶지 않은 어설픈 영혼의 사내

시간의 궤적을 가르는

가로등 불빛에 가슴 찔려

 

 


 

 

전형철 시인 / 다시 죽다. 2

 

 

하늘이 운다

시혼의 굴레를 벗고

술에 찌든 하루의 일상을 벗자

어김없이 詩의 하늘이 운다

질기디 질긴 연의 겁으로 옭아매고

마흔애(哀) 절절한 상념의 시간마저

차디찬 회억으로 잠식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시뻘건 물살에 씻긴

앙상한 가슴팍 드러내고

스스로 자위하는 강을 보라

천년의 시공을 격한 자리

난세의 시간 역으로 거슬러 올라

너를 무한한 흐름의 강심에 앉히고

나는 무심히 흐르는 바람이 되라 하건만.

 

소요의 선상에서

적요의 수치를 가늠하는

눈물겨운 단장(斷腸)의 아픔이

바람의 공명(共鳴)을 타면

낯선 해그림자 속, 숨어 울던

피폐한 영혼의 파리한 울림에 가슴 찔려

 

 


 

 

전형철 시인 / 남자

 

 

한 번은 날아볼 일이다

지평의 경계를 딛고 선

곤고한 삶의 그림자를 지우고

겨드랑이 사이 순백의 날개를 피워 올려

저 붉은빛 노을에 가 닿으려

꼭, 한 번은 날아볼 일이다

 

굳건한 믿음으로 쌓아 온 신념의 문을

불신이란 의문으로 다시 열어

온유한 가슴에 소요의 풍진을 부르는 우화의 날개가

꿈꾸는 달빛의 몸짓으로 바람의 얼레에 감기면

서러운 눈빛으로 온몸이 젖는 갈맷빛 남자

 

다시 슬픔 속으로 잠기는 애잔함을 지우려면

차라리 무너지는 모두가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것을 믿으며

제 몸속 터져나오는 응축된 노래로

속살 찢기던 슬픈 여정을 호명해 볼 일이다

 

남자의 길이란

나락의 세월 위에 놓인 절망을 지우려

몰래 흘린 한숨 바람으로 닦아내며

이울던 혼불, 다시 지펴올리는 일이기에…….,

 

 


 

 

전형철 시인 / 울게 하소서

 

 

마른 빗소리

맨땅에 부서질 땐

눈물로 채운 삶

아프게 무너져 내린 두 무릎으로

주저 없이 울게 하소서

꽃진 자리 상흔 깊게

속살까지 풀빛을 새긴 계절

詩사랑을 앓는 그대 위해

주저 없이 울게 하시어

낮고 낮은 웅크림으로

피폐한 삶과 격렬히 싸우는

가난한 영혼의 외로운 투쟁을 위해

주저 없이 울게 하소서

불볕처럼 뜨겁던 삶

빗소리와 함께 그 아픈 땅 위로

곱게 내려두고, 울음으로

눈물에 모든 슬픔 씻겨가게 하소서

마른 비 사선으로 한 영혼 내려칠 때

온몸을 덮고 있던 희고 단단한 슬픔

한 움큼의 시(詩)로 토해내게 하시어

오늘을 살아가는 낯설고 먼 생명들

목이 쉬도록 울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살아내는 모든 이, 거룩하게

오늘을 이긴 것을 알게 하소서

 

 


 

 

전형철 시인 / 당신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당신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조여매고 동여맨 속 겹 차례로 풀고

꼭 한번은 당신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음하고 습하나, 어디 없이 아늑한 곳

마침내 내가 죽어 더 이상 걷어찰 근심도 없이

한 세월 이골난 두 다리 쭈욱 뻗고 반듯하게 누웠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손가락 발가락

심심할 겨를 없이 썩어갑니다

차마 감지 못 한 눈, 하나 두울 순서를 세느라

낮 밤 구분없이 홀로 바쁩니다

 

임자 있는 기억은 일찌감치 한 몸 되어 자분자분 스며드는데

벼랑 지던 당신의 집 앞에서 비를 맞으며

아득하게 서서 울던 한 그루 나무처럼

내 몸도 마르고 젖기를 거듭하며 앙상합니다

잎 피우기에도 하물며 꽃 피우기에도 이미 늦었지만

정작 본인만 늦은 줄 모릅니다

 

토닥토닥 이마를 두드리며 설움이 쌓입니다

아무리 흐느껴도 무덤 밖은 고요하기만 해서

문상 온 바람의 몸을 빌려 대신 웁니다

 

한 평 너른 뜰 안에, 넌출

이만한 흐느낌도 없습니다

 

막힘없이 뚫린 길을 통해

당신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매번 가자던 곳

꼭 한번은 당신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지난했던 삶, 두터운 손바닥 휘휘 내저어도

마냥 간지럽기만 한, 한 줌 꿈결인 듯

꼭 한번은 아버지, 당신을 만나려 갈까 합니다

 

 


 

 

전형철 시인 / 뜨거운 이름

 

 

탁해 보이던 당신의 눈동자

그저 세월의 흔적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끊길 듯 이어지던 여린 숨결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며

세월의 더께 가득한 노안에 담기든 흐릿한 미소가

차마 건네지 못한 유언인 줄 알았다면

날 보듬어 안으시는 당신을 제가 한 번 더 안아드릴 걸 그랬습니다

앞서 가신 하늘길 더듬으며 뜨겁던 님의 가슴에 안기고파,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건만

이내 몸. 어찌 이리도 무겁고 눈앞은 왜 이리도 흐린지, 마냥 눈물만 떨굽니다

세상의 바깥, 님의 길은 어떠하신지오

세상의 안쪽, 저의 길은 여태 오리무중입니다

울지 않으려 악문 입술을 비집고

아린 신음만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나올 뿐입니다

피끓는 젊음을 맨땅 위에 누이고

세상살이 고난의 중심을 향해 스스로 나아 갔기에

이 가슴에 남아 있을 아픔, 결코 없을 줄 알았습니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 녹이며, 오늘, 이 시간 길고 긴 통곡으로

파리하게 병든 영혼마저 혼절케 하는 처절한 호명 아버지

이렇게도 그리운 이름이 당신이셨습니까

이토록 뜨거운 이름이 당신이셨습니까

 

 


 

 

전형철 시인 / 뜨거운 이름, 2

 

 

못다한 孝

본받지 못한 효(效)의 근원을 찾으려

해종일 장산 곳곳, 눈물 뿌리며

님의 흔적을 찾던 날입니다

 

길섶, 바람이 흔드는

꽃잎에도 아니 계셨고

해질 녘 장산 너머

멍울 지는 노을 속에도 아니 계시든 님

 

소쩍새 여린 울음을 타고

바람에 춤추는 밤별로, 이제서야

매무새도 고웁게 하늘하늘

빛으로, 빛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바깥

님 계신 곳에서

세상의 안쪽

불효자식 살아 숨 쉬는 곳

차마 못 미더워

애태우던 근심을 앞 세워

이 가슴에 말간 바람소리로

하냥하냥 나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아버지….,

술 한 잔 받으세요.

 

설움에 목 데인

눈물의 권주가에

뜨거운 음성으로 화답가 부르시는

그립디 그리운 이름, 아버지

 

오늘은 대숲에

바람 타는 별빛으로

그 이름, 무장무장 냐리십니다

 

 


 

 

전형철 시인

2007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가 있음. 지훈문학상 수상. 현재 『다층』 편집위원, 연성대학교 교수.